모의 출가

나의 인연이야기

2007-09-28     관리자

나는 불가와 전세의 인연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절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나 어머니를 따라서 고향 근처 밤절이나 서대사 등에 멋모르고 가본 적이 있었고, 학교 이웃절에 소풍을 가서 너무 떠들다가 스님한테 혼난 기억이나 친구 따라 절에 가서 과일, 과자 등을 얻어 먹고 좋아라고 했던 기억도 새롭다.
내가 그래도 철이 들어 6학년 때 졸업여행을 갑사로 가서, 대웅전이며 대적전, 자광탑이며 철제당간 등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절 아래 여관에서 하룻밤을 잔 것이 바로 본격적인 절과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신흥암을 거쳐 지금의 금잔디 고개를 넘어 동학사에 가서 경내를 구경하고 또 절아래 여관에서 하룻밤을 더 잔 것이 그 절과의 인연을 더욱 두텁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대전에 나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고향의 절도 잊고 갑사, 동학사 등도 가까이 못하면서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나름대로 머리도 커져 앞날을 생각하며 걱정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공부를 잘 한다는 주제에 인생을 생각한답시고 이른바 ‘개똥철학’을 할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 3학년 진급을 며칠 앞두고 친구와 장래를 이야기하다가 그나 나나 가난하여 앞날이 불안하고 불투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그 간단한 해결방안으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결정하고 당시에 유명한 은진미륵 관촉사를 찾아 갔다. 불쑥 주지스님을 찾아, 출가의 뜻을 밝히니, 그 스님은 처음에는 의아한 듯하다가 곧장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출가에 따른 여러 가지 서류를 열거하였다. 출가동의서, 건강진단서, 신원증명원, 병역필증 등등.
너무 빨리 말씀해서 메모도 못하고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 스님은 돌아서 들어갔다. 우리는 묵묵히 걸어 논산읍내까지 나와 배고픈 판에 주머니를 털어 자장면을 먹으면서, 다시 손쉬운 결정을 내렸다. 평소에 그런 서류를 싫어하던 내가 “야 서류가 너무 복잡하다.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그러고서 이 출가의 시도는 우습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인연따라 고전문학, 불교문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오계도 받아서 절을 자주 드나들며 스님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정진하는 양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고등학교 불교학생회의 지도교사 나아가 대학생 불교학생회의 지도교수로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적어도 1년에 2차례는 모의 출가를 하게 되었다. 이 불교학생회에서 여름, 겨울에 유명한 사찰, 저명한 스님을 찾아 이른바 수련대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야 일주일도 못 되는 기간이지만, 나나 학생들은 모두가 시한부 출가를 하는 것이라 각오하고 들어갔으며, 가르치고 수련시키는 스님들도 한결같이 ‘출가정신, 출가언행’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어렵사리 출가생활에 적응하고 겨우 지낼 만하면 또 환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임시 출가가 40년 가까이 계속되니, 이에 간이수련회까지 가산하면 지금껏 100여 번의 임시 출가를 겪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어쩐지 이것을 ‘모의 출가’라 부르고 싶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모의 출가가 그런 대로 수련은 되지만 오롯한 실속이 없음을 깨닫고, 언제부터인지 혼자서 모의 출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가까운 계룡산의 조용한 암자를 찾아서 여름, 겨울의 휴가에 10일 전후로 출가하는 데에 맛을 들였다. 이러한 기간은 실로 타의반 자의반이었다. 실은 거의 언제나 그 10일 이내에 세연에 따른 부득이한 일이 생겨 끌려 나왔기에, 관례에 따라 그렇게 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중대한 결정이나 학문적 설계, 긴요한 집필 등에 몰릴 때는 으레 이런 출가를 통하여 그 문제들을 기대 이상으로 해결,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런 재미와 소득이 있는데 그 누가 출가하지 않으랴. 자고로 훌륭한 선비나 학자, 문인들이 이런 출가를 통하여 수행 정진하고 큰 성과와 불후의 업적을 낸 것이 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나는 선인들의 이런 출가행적을 본받는다는 자세지만, 실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0대의 우연한 고비에 이런 모의 출가에 갈증을 느끼고 실제 출가를 각오하여 심사숙고 끝에, 존경하는 법인 스님을 만나 불쑥 “출가하면 어떨까요?” 단순한 이 말씀에, 스님은 내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엄중한 미소로 “큰 일 할 사람들이 다 출가하면 세상 일은 누가 하나요. 재가승도 출가자니, 출가는 마음과 언행에 있어요.” 그 한 말씀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재가승’과 ‘마음의 출가’가 마음에 박혀 지금 집의 2층을 서재 겸 법당으로 꾸미고 집사람의 법호를 따다 ‘진실암’으로 이름하였다. 그래서 2층에 오르면 출가요, 아래층에 내려가면 환속이 되어, 날마다 몇 차례씩 모의 출가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다가 산사가 그리워지면 생활할 것과 공부할 것을 챙겨 가지고 홀홀히 산사에 가면 스님이 반기고 자유롭게 살도록 한다.
조석예불만 참석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내 시간이요, 내 세상이다. 그래서 내 할 일을 내 마음대로 하나니, 이 얼마나 즐겁고 흐뭇하랴. 그러다가 예정된 일을 마무리하고 세속이 걱정되면, 그 보따리를 메고 무게를 느끼면서 진실암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재가승으로서 세간과 절간을 자유롭게 드나들면, 마침내 승·속이 하나로 터지고 모의 출가가 실제 출가로 승화될 날이 올 것이 아닌가. 참된 출가가 진정 ‘마음과 언행’의 문제라면, 이제 나도 고희의 나이로나 은퇴의 처지로 보아, 참된 출가의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에 전세의 불연을 체감하면서, 구원의 향수처럼 문득문득 갈망하던 그 출가가 정말 이대로 실현될 것인가.
나는 지금 모의 출가를 의식하지 않고 갑사에 와서 조석예불만 동참하며 내 세상 자유천지를 누리며 내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래서 출가란 말조차 버리고 싶다. 한가한 때 대웅전은 물론 대적전, 자광탑, 철제당간 등을 거닐면서, 그 6학년 졸업여행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 올리고 있다. 10대의 소년이 오늘 70대의 늙은이와 하나가 된다. 참으로 기막힌 불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