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반조(返照)하는 것이 없으면 경전을 봐도 이익이 없습니다”

교해선림/조계종 승가대학원장 혜남스님

2007-09-28     관리자

본분사 의 입장에서 보면 해가 저무는 것도, 새롭게 오는 것도 아니건만 연말연초가 되면 괜시리 호들갑스러워진다. 겨울 나목(裸木), 텅빈 들판, 냉랭한 회색빌딩 사이로 몰아치는 북풍한설… 계절조차 한몫 더해 근원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지는 세밑 참 스승이 그리워지는 때다.
“내가 지도한다고 할 수 있나요? 같이 연구하고 탁마하는 것이지요.” 지난 12월 8일 승가대학원장으로 취임, 승가 교육의 중심에 서계신 혜남 스님의 소탈한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듯했다.

나와 남을 살리면서 사는 길은 무엇인가
만년 행자같이 초발심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이가 참 수행자일 것 같다는 망상을 피운 적이 많기에 스님을 뵐 때마다 출가 때와 행자 시절 이야기를 여쭤보곤 한다. 그리곤 마음 속에 편견 한 가닥씩 더 쌓아올리면서도 그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알량한 짐작이 제법 맞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풀을 베고 밭을 갈면서 벌레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 아팠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한편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하루는 자치통감을 읽다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시킨 한신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을 당하는 구절에서 가슴이 탁 막혔다. 세상사람들에게 어진 임금으로 알려진 유방이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서 충신을 죽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뜬구름 같았고, 내 행복을 위해서 남의 불행을 딛고 서야 하는 것이 세상살이인 듯했다.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한 길이 무엇인가? 궁리끝에 도를 닦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나섰다. 거리를 헤매다가 어떤 스님의 걸망진 뒷모습이 평화로워 출가결심을 굳혔다.
“모든 법은 인연따라 나고 인연따라 멸한다.”는 경구를 가장 좋아하신다는 스님의 말씀처럼 출가한 지 어느덧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초발심으로 수행의 길을 부지런히 걷는 것 또한 인연이리라.

혜능 스님이 남쪽에 가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듯
“처음에 창녕에 있는 통도사 포교원을 찾았는데, 신라 고찰로서 주지스님도 훌륭한 분이니 관룡사로 가라고 하시며 소개장을 써주셨지요.”
산길 이십 리 길을 걸어서 관룡사에 도착하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몸은 물 마신 솜처럼 축 늘어졌는데, 주지스님은 안 계시고 공양주 보살님이 쉬어갈 방이 없으니 마을로 내려가라고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소개장은 별 영험이 없었는데 예배한 공덕은 담박에 나타나더군요.”
등 떠미는 공양주 보살님에게 사정하여 법당마다 돌아가며 참배를 했다. 그 무렵 가장 고액환이었던 100원짜리 지전을 불전으로 올리면서 ‘출가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발원하니 뜻은 즉각 이루어졌다.
당시 제국대학을 나오신 주지스님께서는 천가시(千家詩)를 가르쳐주셨는데, 왜 출가한 사람이 천가시를 배워야 하느냐고 여쭈니 “너는 유가의 성인군자를 배웠으니 보통 인간으로서 정서를 함양한 다음에 노장을 배우고 그 다음에 불교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듯 따스한 정을 나누며 신행생활을 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군 입대를 하기 위해 하산하는 날까지 예불하고 땔감하고 밭일하고 하루에 시 한 수씩 배우는 것이 행자생활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제대를 하고 관룡사를 다시 찾았으나 다정도 병이라더니 유난히 따사로웠던 그 스님은 이미 속세로 떠난 뒤였다. 허탈감 속에 군대시절 틈만 나면 찾아갔던 부산 대각사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 주지스님은 만날 수 없었고, 도를 닦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싶어 무작정 기다렸다.
“남보다 행자기간이 다소 긴 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마당 청소, 쓰레기 버리기, 부엌 일 돕기, 연탄 갈기 등 온갖 잡역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해냈다. 사과 궤짝에 담아놓은 쓰레기를 청소차가 오면 올려주다가 연탄제를 뒤집어 쓰기도 하고, 여름에는 물이 주르륵 흐르는 수박껍질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5~6개월이 흘렀고, 마침내 계를 받았다.
“계받는 날 주지스님을 처음 뵙게 된 셈인데, 주지스님께서 혜남이라는 법명을 주시면서 ‘옛날 육조 혜능 대사가 행자생활을 잘 견디어 낸 다음 인연따라 남쪽에 가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듯이 너도 인연을 기다려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는 뜻으로 주는 것이니 잘 수지하라’고 하셨지요.”
은사스님에게 처음부터 신임을 받은 스님은 계를 받자마자 대각사의 큰 살림살이를 맡게 되었고, 더욱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불현듯 ‘내가 도 닦기 위해서 출가했지 살림이나 살려고 출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강원에 입학했다.
통도사 강원에서 홍법 스님에게 사교과정인 기신론까지 배우고, 양주 흥국사 호경 스님 문하에서 치문부터 다시 배웠다. 수민 스님과 종범 스님과 같이 배웠던 흥국사 강원 시절 하루하루 경안이 열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데 절사정으로 강원이 폐지되었고, 그 길로 선방으로 직행하였다. 경전 공부로 신심은 다졌으니 실참실구해야겠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줄이 너무 팽팽해서도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된다
“관음사 향곡 스님 회상에서 첫 철을 났는데 별 소득이 없었지요.”
일단 강원(범어사)을 졸업하고, 오대 적멸보궁과 삼대 기도처를 찾아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뒤에 인천 용화사 전강 스님을 찾아 뵈었다.
“열심히 예불하고 운력에 동참하는 것을 보시고, ‘중은 주객이 따로 없다’시며 방부를 받아주셨지요.”
그것은 참으로 예외적인 일이었다. 10년결사 중에 방부를 받아들인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기도 가피라며 겸손해하지만 스님이 전강 스님을 감복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정진력을 갖춘 훌륭한 수좌였다고 도반스님들은 회고한다.
“어느 날 어느 노장스님이 ‘하루에 화두가 몇 번이나 들리는가?’라고 물으시는데 ‘화두를 들면 한치의 틈도 없이 여일하게 해야 할 터인즉 한 순간이라도 놓칠 리가 있습니까?’라고 서슬 퍼런 기세로 답하자 그 노장스님, 빙그레 미소로 화답하시더군요.”
그랬다. 용화선원에서는 하루종일 틀고 앉아 있어도 다리 아픈 줄 몰랐고, 자나깨나 화두 속에서 살았다. 매양 성성적적한 화두삼매 속에서 환희심에 충만한 나날이 지속되었는데 어느 날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평소 스님을 가상하게 여긴 선배스님이 영화구경 시켜준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화두 들랴, 스크린의 자막까지 읽으랴 하는 통에 상기병이 생겨 화두만 들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해제 후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을 찾아 뵙자, “용심(用心)을 못해서 그렇지. 공부할 때는 절대로 조급증을 내서는 못써. 송화두(誦話頭)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공부는 너무 팽팽해서도 안 되고 느슨해서도 안 돼. 알맞게 해야지”라고 조언해주셨다.
경봉 스님 말씀대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서 금생에 안 태어난 셈치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앉기만 하면 졸고, 깨면 끊임없는 망상이 덮쳐 막막하기만 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도 모르고 시간만 자꾸 흘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여럿이 모여 비문을 읽어내려가는데 사람들이 잘못 읽는 것이었다. 모두들 참선만 중요시했지 부처님의 말씀은 소홀히 여기는 풍토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육조 혜능 대사께서도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법을 깨쳤고, 우리 나라의 보조 국사께서도 육조단경을 보고 혜안이 열리지 않았던가.
“선방에 앉아 밥만 축내는 것보다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배워 마음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흥사 강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초발심자경문부터 다시 배웠고, 마침내 운기성원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기에 이르렀다. 백파 스님과 한영 스님의 강맥을 이은 운기 스님은 스님의 실력을 인정, 한국에서는 최고라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전강을 받은 뒤 부산 대각사에서 신도법회, 청년법회를 열정적으로 지도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불교대학의 본산격인 동경의 대정대학 동양 철학과에 입학하여 동대학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하였다. 경봉 스님께서 일러주신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수행법은 경전공부에도 유효했고, 10여 년 동안의 일본 유학시절 석사학위논문인 「징관의 유도사상」과 「당 덕종의 공덕사」 등 열 편에 가까운 논문을 썼다.
91년 귀국한 뒤 해인사와 법주사 강주를 거쳐 93년도에 중앙승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수행관장과 불전국역연구원장으로 학문을 통해서 실참실수하는 학풍을 조성, 학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스님은 얼마 전 승가대학원장이라는 중대한 소임을 맡았다.
“출가하면 모두가 일불제자(一佛弟子)인데 현재 기본교육기관이 없어 지방 강원, 중앙승가대 등에서 제각기 수학하여 가치관이 일치되지 않는 결과를 낳고 있지요. 승가대학원은 세속으로 말하면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강사스님을 배출하는 곳인 만큼 강의보다는 논강과 토론 등을 통한 연구풍토를 조성할 생각입니다.”
같은 과제물을 가지고 발표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함께 연구하는 강원의 논강제도를 십분 활용한다면 훌륭한 공동연구물이 나올 수 있고, 스님들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승가대학원생은 졸업과제물로 반드시 단행본을 출간해야 하는데, 종단적 지원이 없어 제각각 책을 내다보니 출판사도 각각이고 책 크기도 각각인지라 일관성이 없습니다. 승가대학원출판부를 등록하여 학인스님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생각입니다.”
문장으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학문을 돕는다더니, 조계종승가대학원을 바로 그렇듯 아름다운 경전 연찬의 전당으로 일구리라는 스님의 각오, 대중의 근기가 천차만별이니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스님의 세심한 배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도를 닦고 경전을 공부하는 까닭
“선을 통해서 마음을 깨닫고, 경전을 통해서 마음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반조하는 것이 없으면 경전을 봐도 이익이 없습니다.”
참선수행과 경전공부가 둘이 아님을 체득하였지만 지금까지도 선방생활을 그리워하는 스님은 해인사 강주로 부임한 첫해에도 수좌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했다. 한편 참선 수행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린 연후에야 경전을 보는 것은 습관이 되었다.
“영명연수 선사께서 ‘학문은 무량겁의 업식종자를 씻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셨듯이 출가 수행자에게 학문(경전 공부)과 수도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불성을 찾자는 것이 경전 공부라면 선방에서는 화두를 열쇠로 고유한 불성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원교육은 신심에 바탕을 두고 부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여 부처가 되자는 것입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의 토대 위에 자율, 자립, 자조, 화합 등 교육의 4대 원칙을 세우고 있는 스님은 무엇보다 공부하는 이, 즉 증득하고자 노력하는 이의 행동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고 은연 중 언제 어느 때나 자비행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스님은 자비행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도반인 송산 스님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범어사 강원 졸업할 때 졸업기념품을 남겨야 하는데, 송산 스님이 범어사에서 얻어먹고 사는 불쌍한 사람에게 집을 하나 지어주자고 제의해서 모두들 흔쾌히 시주를 했지요. 집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는데, 송산 스님이 직접 벽돌을 사서 집을 지어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독송을 권하면서 보현보살의 원행사상을 제각기 삶의 터전에서 실천할 것을 간곡히 설하는 혜남 스님,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밝히고 보현보살이 되어 이웃을 밝히다 보면 우리 사는 세상 그대로 극락이 될 것이 아닌가. 또다시 경제위기설이 고개를 들며 어려운 이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이때 신해행증의 길을 가고있는 불자들이 나서서 이웃의 고통을 보듬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