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 38.대하(大河) 드라마의 회향(回向)

수미산 순례기(마지막회)

2007-09-28     김규현

야 룽장포는 히말라야를 휘돌아 벵갈 만(Bengal 灣)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수미산 화두’를 들고 설역고원(雪域高原)을 헤메인 지 벌써 3년. 가슴 속에 자리잡았던 수미산 환영(幻影)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올라온 티벳 고원에서의 짧지 않은 시간들은 그렇게 이미 과거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고 그리고 이제는 정말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앞에 가로 놓여 있었다. 다름 아닌 내 영혼의 문제였다. 이미 오래 전 내 영혼은 수미산 아래의 시냇물에 풀어 내렸기에, 그것은 물길을 따라 지금도 흘러 내려오고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다시 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야 이 설역고원을 떠날 수가 있을 터이니까 … .

그러기 위해 일단은 이 글의, 3년 전의 ‘프롤로그’를 회고해 보도록 한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주의 중심축(重心軸)으로 알려지게 된, ‘수미산의 모델이 되었던 성스러운 산’이 있었다. 그 산은 실제로 대설산 히말라야 산맥 너머 티베트 고원에 솟아 있었는데,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범어인 카이라스(Kailas)를 비롯하여 티벳어로는 강디세·강린포체 그리고 한어로는 향산·향취산·곤륜산·게라사산으로도 불려왔다. 또한 이 산은 불교를 비롯한 4대 종교의 뿌리였으며 그리고 샤마니즘과 딴트리즘도 역시 이 곳을 모태로 삼기도 하였다.

10년 전 해동의 나그네는 어떤 부름소리에 이끌려 여러 이름을 가진, 그 성스러운 산에 천신만고 끝에 당도하였고, 그 산의 북면(北面) 아래의 냇가 - 갠지스와 인더스의 발원지이며 분기점이 되는 시냇물 - 에서 황하와 양자강의 발원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꽃초를 꺼내 불을 붙여 가만히 물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던 적이 있었다.

“내 지금 이 연꽃에다 내 영혼을 풀어 얹으리라! 그래서 너를 따라, 내 영혼을 따라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리라. 갠지스면 어떻고 인더스면 어떠하리… .” 그렇기에 당연히 해동의 순례자의 발길도 그를 따라가야 하였지만 그 물길은 현실적으로 날개를 가진 새들 이외에는 따라 가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우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고 그리고는 최후의 지점에서는 내 영혼을 다시 건져 낼 수밖에 없었다.

성스러운 산에서 발원한 네 개의 시냇물 중에서 동쪽으로 흐른 마천하〔馬泉河, 즉 범어의 착수(Ckaksu), 티벳어의 탐촉감밥〕의 일생은 마치 한 편의 대 서사시(敍事詩)에 비유될 수 있다. 아시아대륙 서부의 파미르 고원에서 솟아올라 동쪽으로 2,400km를 뻗어 내린 ‘신들의 정원’의 주인인 히말라야 여신들과 영웅호걸들이 엮어내는, 그런 장쾌한 대 서사시말이다.

‘야룽장포곡(曲)’이란 이름의 이 대하 드라마는 여신의 그 하얀 피부인 만년설이 녹아 내린 그 ‘순결한 눈물’가닥가닥을 황량한 설역고원에 흘려 보내며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어 나가는데, 이는 설역고원의 뭇중생들을 먹여 살리는 젓줄로서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히말라야와 나란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대지의 대동맥이 되어 흐른 이 야룽장포는 설역고원과의 시절인연이 다한 뒤에 대설산을 휘돌아 인도 동북부의 넓은 아쌈 평원으로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가 부라흐마푸트라(Brahmaputra), 즉 ‘신의 아들’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흐른 다음 갠지스 본류와 합류하여 벵갈 만으로 들어가며 그 대하 드라마를 회향하게 된다.

그 대 전환점이 바로 히말라야 산맥 동쪽의 마지막 봉이며 높이로는 제15좌인 남자바와산 (Namjagbarwa, 해발 7782m) 아래의 대협곡 지대이다 이 곳, 즉 현 행정구역상 링즈〔林芝〕 지구의 야룽장포 하류 지대는 지형·기후 조건이 특이한 지방이다. 우선 해발 고도가 티벳 고원에 비해 비교적 낮으며 대설산의 산기슭에 위치하기에 고온다습한 밀림 지대를 이루고 있고 계곡도 거의 폭포에 가까운 급류이다.

그렇기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아직도 전인미답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정글 지대가 모두 인간의 발길을 허락된 것에 비하면 지구의 ‘최후의 처녀림’인 셈이다. 한 마디로 이 지역은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베트의 일반적 개념의 땅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해동의 나그네의 마지막 여행길은 그 회향처를 향해 가야만 하였다. 역사의 고향 제탕〔擇當〕을 경유하여 어렵게 도착한 링즈〔林芝〕 부근에서 구름 속에 들어 있는 신비스런 남자바와 봉을 바라보며 그 대협곡에서 발길을 돌리며 내 ‘영혼의 강’과 헤어져야만 하였다.

에필로그,“카레슈아! 카레페아!”

이제는 정말 설역고원을 떠날 때가 되었다.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짐 정리를 마치고 그 동안 정들었던 벗들과 송별주를 나누고 이승에서의 재회를 약속하였다. 다음 날 신새벽에 라싸를 떠나 우호공로를 통해 다시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향하였다. 비록 몸은 야룽장포를 따라 대설산을 넘지는 못해도 다른 길이라도 대설산은 넘어야만 하였다. 그래야 벵갈 만에서 내 ‘영혼의 강’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설역고원에는 겨울이 이른지라 히말라야 남녘 산기슭의 작은 마을 니에람(해발 3750m)에서 길은 벌써 폭설에 두절되어 있었다. 국경선인 우호다리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니었지만 내년 봄이 되어야 길이 뚫릴 것이라는 부락민의 말에 쫓겨 적지 않은 짐을 둘러메고 눈발을 헤치며 쟝무로 향하였다. 다행히 그리 어둡기 전에 마지막 마을 쟝무(해발 2300m)에 도착하여 한숨을 돌리고 나서, 아마도 국경선인 우호다리(Friendship Bridge) 건너편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네팔 쪽의 국경 마을 코다리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글자 그대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난 3년간의 설역고원에서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카아라스의 성스러운 모습도, 마나사로바 호수의 맑은 물결도 지나갔고 신비스러운 구게 왕국과 다와쫑 계곡도, 라싸의 골목 골목도, 죠캉 사원의 파골 광장도 지나갔다. 그리고 따뜻한 정을 나눠주던 티베트족 친구들의 선한 얼굴들도 스쳐 지나갔다.

“카레슈아! 카레페아!(안녕)”

상서로운 오색 설연화(雪蓮花)가 피어 있는 순백의 땅. 착한 사람들이, 고난의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는 마이트리아(彌丁)의 땅, 티베트여!“ 그래 이제는 ‘수미산’을 내려놓자. ‘두 마리 황금물고기’도 내려놓자. 그리고 아직도 확연치 않은 ‘삶도 죽음도 아닌 그것’마저도 내려놓자. 그리고 돌아가자.”

수미산이 들고 다니기에 무거워서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황금물고기를 놓칠까봐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가치없다고 생각되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그것들을 내려놓는 이유는 단 하나, 언젠가 그것들이 다시 절실해졌을 때 다시 들기 위해서다. 그 때를 위하여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설산 설연화가 피어 있는 순백의 고원이 내 ‘전생의 고향’이고, 내 ‘후생의 귀의처’라 할지라도 지금은 이승에서의 인연들이 살 부딪치며 살고 있는 ‘해동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아직도 남아 있는 이승에서의 삶에 충실해야겠다.

문득 귓가에 귀에 익은 티벳 민요가 한 가락 바람결에 들려오고 있었다. 바로 ‘샴바라’였다. 어쩌면 고통과 슬픔이 없는 이상형의 나라 ‘샴바라’, 즉‘샹그리라(Shangrila)’는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이 아닐까?

한 아름다운 곳이 있다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려 한다네.
그 곳은 사계절 항상 푸르고 꽃피고 새들 노래하는 곳이라네.
그 곳은 고통도, 근심도, 걱정도 없는 곳이라네.
그 곳의 이름은 ‘샴바라’라고 한다네. 신선들만이 사는 곳이라네.
아! 그러나 그 곳은 그리 먼 곳이 아니라네.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