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 폐지운동, 인권 존중과 생명 해방을 위하여

오늘을 밝히는 등불들/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

2007-09-27     관리자

불교계 에서 인권운동 하면 진관 스님을 연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그동안의 불교 인권운동에 관한 진관 스님의 남다른 열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교의 인권 운동의 일천(日淺)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진관 스님이 최근 사형제 폐지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스님은 지난 해 8월 10주년을 맞았던 범민족대회의 남측 통일선봉대장을 맡아 활약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지난 6월 형기만료로 석방된 터.
`‘불교 사형제 폐지를 위한 불교 선언문’을 통해 스님은 이미 “법의 이름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해도 이는 또 다른 살인을 하는 행위” 라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간을 위하는 인간존중의 참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불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스님은 보름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특유의 어투며, 지난 날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코를 훌쩍이는 모습은 그대로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 스님을 지켜보는 이들은 이 지독한 감기의 시작이 지난 9월 2일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북녘으로 보내드리고 난 뒤인지라 한 고비를 넘긴 마음의 헛헛함 때문은 아닌지 짐작해볼 따름이다.
사실 스님들과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지난 ’96년 10월 국가보안법으로 세 번째 구속되었을 때의 죄목 중에 국가기밀(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 및 양심수 명단)누설 항목이 있었던 것.
“’93년 대표적인 비전향 장기수였던 이인모 선생님이 송환되는 걸 보니 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었지요.
인권단체에서 줄기찬 송환요구가 벌어지면서 ’95년도에는 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를 논의하는 열 개가 넘는 단체들이 연합할 때 내가 부의장을 맡아서 활동했지요.
기독교나 천주교는 일찍부터 자체적으로 인권위조직이 있었고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지만 정부에서 압력을 가하니까 발을 빼는 상황이었구. 그때 감옥갈 결심을 하고 우리 불교인권위가 대각사에서 송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하고 북쪽의 조선불교도연맹에 회담제의 하고 대대적으로 송환문제를 거론하고 나섰지요. 그러다가 구속된 거구요.”
3년 6개월의 형량을 선고 받고 복역 중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98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자마자 스님은 당시 비전향장기수 명단을 교도소와 번호까지 한겨레신문 광고난에 게재하는 사건을 터트린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비전향 장기수의 현실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자신에게 족쇄를 채웠던 국가보안법 적용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한편 다시 한번 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송환 촉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1년도 채 안돼 스님이 신문에 게재했던 비전향 장기수 전원이 석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 9월 1일에는 비로소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역사적인 북녘 송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 사이 또 10개월의 옥고를 치른 진관 스님이기에 비전향 장기수의 환송행사에 참석해 스님이 느낀 감회는 더욱 남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쭉 사회운동, 민주화 운동을 해오면서 철창 신세를 진 건 수도 없고 구속도 네 번이나 됐었지. 직접 감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과 폭이 넓어졌어요.
문민정부라고는 했지만 기본적인 법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인권탄압은 여전했거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권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고민했고, 이들을 보면서 양심수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이들의 현실을 알려나감으로써 문제에 접근할 수 있고 해결책도 찾을 수 있는 거였지.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도 그렇게 접근했던 것이고.”
1974년 시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진관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신흥사 사건 때 23일간의 단식으로 종단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찍이 민중불교운동에 투신, ’84년에는 불교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불교운동의 선각자였다.
’86년에는 청화 스님, 지선 스님 등과 함께 정토구현전국승가회를 결성 부의장과 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87년에는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대회에 정토구현전국승가회 부의장으로 참가했다가 구속, 모진 탄압을 받기도 했다.
’89년 만들어진 ‘전국민족민중운동연합’의 인권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각종 민중운동에 불교계의 진보적인 민주인사로 참여했던 스님은 ’90년 11월 불교인권위원회를 설립, 비로소 불교계에 공식적인 인권운동시대를 열어나간다.
타종교에서는 70,80년대부터 인권단체를 결성해 사회의 저소득층과 노동자, 농민들의 인권확립에 적극적이었는 데 비해 불교는 농성장조차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불교계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소극적이었다.
불교인권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자문을 구하고자 찾아간 스님이나 학자들은 수행만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또한 창립법회 장소에서부터 사무실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던 불교인권위원회는 그 동안 재소자돕기 운동, 불교관계법 공청회 개최, 불교인권상 제정, 국가보안법폐지운동 등 불교와 사회 안팎의 인권 분야에 꾸준히 참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구치소에 들어가서 보니까 사형수들이 나한테 관심 갖는 게 대단하더라구요. 내 옆방에도 사형수가 있었는데 양심수들에게는 호의적이었지요. 그런데 97년 12월 전국의 사형수가 스무 명 넘게 사형집행됐어요.
어제까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는 저 세상으로 가버리니까 옆에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 무서움을 느끼게 돼요. 그때 정말 사형제 는 폐지되어야 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지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가 반이 넘어요.
최근 진관 스님이 사형제폐지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이유이다.
이를 위해 스님은 사형제폐지 불교운동본부를 결성, 10만 불자 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양심수 석방, 70세 이상 수감자의 석방, 소년수 교육사업 등을 집중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지방조직 결성을 준비하고 있다.
스님은 이야기 중간 중간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경찰의 감시로 어디에도 거처할 곳이 없을 때는 차라리 감옥이 더 나았다고 했다. 정말일까마는 진관 스님에게 감옥은 토굴과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경전을 읽고 무수히 많은 시를 썼다.
이번 구속 기간 동안에는 재판부에 낼 생각으로 마음놓고 시를 썼다. 쓰고 나니 시집 50권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썼던 시가 20권 정도는 되니 감옥에서 쓴 시가 무려 70권에 달하는 셈이다.
경전공부와 책읽기는 물론이고 동남아 불교와 중교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적 흐름도 살펴보았다. 일본의 불교의 역사에서는 고행 속에서 법화사상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일련 스님의 행적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요즘 “나무묘법연화경” 일곱자 염불운동과 법회 준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절집에 들어온 후 절집 생활 반절을 사회운동을 했습니다. 이제는 이 불교 운동이 사회에 올바르게 자리매김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각 본사마다 인권위원회를 만들고 종단에서도 인권문제에 대해 좀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불교인권위원회도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인권 교육을 실시해 불교의 인권인식과 활동을 넓혀나가겠습니다.”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북한학과의 막바지 졸업논문 준비와 인권법당 건립기금 마련 전시회 준비로 또 분주한 스님의 바쁜 발걸음이 더없이 반갑다.
인사동 길 그 특유의 검은 빛 승복 뒤로 총총히 걸음을 내딛는 스님을 바라보며 언젠가 스님이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기고한 글 한부분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다른 곳에서 자기 자신의 인권을 옹호해주는 단체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수감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느낌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정치 경제적 문제도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