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대사의 구국혼 서린 불교 중흥도량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김천 황악산 직지사

2007-09-27     관리자

추풍령은 단순한 고갯마루가 아니다. 충청 경상 전라 삼도의 접경이면서 서울과 부산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남한의 복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곳 휴계소 안으로 들어가 샛길을 죽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오래잖아 황악산(黃岳山)의 직지사(直指寺)에 들어서는데 위에서 말한 풍수적 조건으로 비추어 볼 때, 산문의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란 편액은 어쩌면 당연한 자부심의 소산일 것이다.
직지사에 여러 민간어원이 따르지만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주라는 것과 관련지어 화상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들어설 자리’라 한 데서 ‘직지’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유래는 어느 것보다 흥미를 끈다. 선산에서 직지사 터가 보일 리 만무하나 어쨌든 화상이 말한 대로 황악산은 큰 절이 들어설 만큼의 넉넉한 품새를 간직한 것만은 사실이다. 황악산의 최정상을 비로봉이라 부르지만 금강산처럼 날카롭기는커녕 거기서 발원한 산 줄기는 길고 길게 드리워져 곳곳에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절이며 집들이 앉을 자리를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다.
능여, 내원, 운수 계곡을 끼고 조성된 윗쪽의 산내 암자, 그리고 아랫녘 본사가 거느리고 있는 65동의 전각을 비롯한 숱한 당우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는 불가능한 터. 따라서 필자는 일주문을 거쳐 길을 올라가면서 눈에 띄는 대의 풍경을 중심으로 이 절의 윤곽이나마 잡아내는 것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었음을 실토한다.
절 입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거석을 포개 쌓아 성벽같이 튼실한 축대 위에 만덕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왼편을 따라 난 송림 안길을 좇으면 대웅전으로 인도된다. 만덕전 앞길은 차가 주로 드나들지만 풍부한 수량에다 시원한 물소리가 특히 여름철 땀흘려 찾은 내방객들에게 삽상함을 안겨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대신 일주문에서부터 걸어오는 이들이 택하게 마련인 송림 길은 일주문, 대양문, 금강문, 사천왕문을 차례로 거치게 되어 있어 사바의 진애를 털어내고 법당에 참배하기 전 최소한의 청정심을 갖추게끔 하는 데 각별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할 것이다.
대웅전이 중앙에 위치하는 일반의 가람 배치가 이곳에선 달라지는데 아마 전각들이 촘촘하게 들어서면서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윗쪽으로 관음전, 응진전, 명부전, 비로전 등이 일렬로 이어지고 그 앞 공터에는 단풍나무가 열 지어 청록의 빛깔로 철마다 색다른 운치를 보태준다. 조경의 눈썰미가 돋보이는 다른 예는 단풍 사이로 에돌아 흐르게 만든 돌수로(水路)다. 올 봄 수로물에 둥실 떠 흘러가던 낙화를 보며 잠시나마 필자는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의 재현을 목도했거니와 목탁소리 낭자한 경내에서 빨간 단풍을 띄우며 사바세계로 흘러가던 세류의 지즐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전각들 가운데 비로전과 대웅전만이 마당을 각각 따로 갖고 있고 그 앞에는 똑같은 형태의 삼층석탑이 각각 하나둘씩 서 있다. 모두 통일신라 시대에 문경 도천사지에 조성되었던 석탑 삼기가 이리 옮겨졌는데 두껍게 덮인 청태 때문인지 이건(移建)의 낯설음은 볼 수 없었다.
발걸음을 위로 옮기다 보면 계곡을 가로질러 극락전과 통하는 도피안교(到彼岸橋)가 나타난다. 한데 아쉽게도 다리 건너 길목에 외부인의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가던 발길을 붙잡는다. 금할수록 욕망은 더 솟아나는 법이라던가. 피안이란 먼 데가 아니라 바로 다리 건너인데, 계곡물 위에서 물안개라도 아련히 피어올라 피안의 신비감이 더해지는 때라면 건너고픈 마음이 한결 용솟음쳐질 그런 장소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도피안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몇 켤레의 고무신뿐 인기척 없이 정적감만 감도는 저 선방 안의 치열함은 못 본 채 부질없이 피안만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리를 건널 방법은 밀치고 피안의 풍경에만 사로잡힌 나, 괜히 무안해지며 발길이 절로 되돌려 진다.
길을 내려오던 필자는 사명각 앞에서 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 곳에는 보통 탱화가 아닌, 형형한 눈빛, 수려한 얼굴에 긴 수염의 사명(四溟) 대사(1544~1610)가 소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계신다. 좌우 시자승이 각각 육환장과 보검을 받들고 서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사실 사명당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절은 곳곳에 있으므로 대사를 모신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곳처럼 아예 사명각이란 편액을 붙인 곳은 보질 못했다. 그만큼 사명 대사와 직지사의 인연이 깊다는 뜻이겠다.
문헌에 따라 대사의 출가 시기와 출가처가 혼란스럽게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사는 출가 전 그러니까 13세 때 유촌 황여헌(黃汝獻)의 문하에 들어 먼저 속서(俗書)를 공부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데 그 스승이 머물고 있던 곳이 다름 아닌 직지사 아랫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후 3년이 지나 16세가 되던 해 부모님을 다 여읜 그는 세속의 공부를 뒤로 하고 근처 직지사로 출가했고 그 때 직지사 주지로 있던 신묵(信默) 화상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었다. 한데 신묵 대사는 사명 대사를 만나기 전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한다.
어느 날 오후 신묵 화상이 좌선을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들었는데 절의 천왕문 왼편에 있는 큰 은행나무 밑에 황룡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꿈에서 본 천왕문 은행나무 밑으로 가 보았다. 한데 바로 그 자리에 웬 소년 하나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흔들어 깨우니 소년은 자신이 이 곳에 온 까닭을 곡진하게 아뢰었다. 방금 전의 꿈과 그대로 부합된 것에 다시 한번 놀라며 신묵 대사는 기꺼이 소년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훗날 그 소년이 사명 대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직지사의 숱한 유적과 고승들의 면면을 이처럼 짧은 글로 어찌 감당할까만 이 절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만은 남기고 싶다. 흔히 우리는 찬란한 과거의 불교 역사를 회억할 줄만 알았지 지금 그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실천력은 취약하지 않나 싶다. 녹원(綠園) 화상의 견인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불사에 끝에 직지사가 현대 도량으로서 재탄생했다는 것, 이는 한 절의 특이한 연혁을 넘어 불교 중흥이란 화두를 앞에 두고 골몰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