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 36.토번왕조의 능묘군(陵墓群)

수미산 순례기36

2007-09-27     김규현

석양 속 왕가의 무덤들

원숭이의 후손인 페민족 즉 티벳민족의 발상지인 제탕마을을 끼고 흐르는 야룽계곡은 하류에서 갈라져 청게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상류 서남방 30킬로 지점에는 또 하나의 역사의 고향 청게마을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은 바로 토번왕조를 일으킨 역대 왕들이 잠들어 있는 ‘영원한 안식처’였다.

토번왕조(吐蕃王朝)의 전신인 야룽왕조는 하늘에서 내려 온 천신의 후예답게 첫 임금 네티첸포에서 6대 첸포(王)까지는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 묘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최초의 반역사건이 생긴 7대 디굼첸포 이후에는 하늘과 연결된 ‘신성한 끈(天繩)’이 끊어져 역대 첸포들은 조상의 땅 청게마을 주위에 그 육신이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왕궁 또한 신화 속의 윰부라캉에서 이곳 청와다제성(靑瓦達孜城)으로 옮겨져 7세기 송첸감포에 의한 라사 천도 이전까지 수 백 년 동안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곳 청게평원은 초기 토번왕조의 얼이 스며있는 역사적인 장소인 셈이니 마땅히 참배해야 할 곳이었다.

먼저 해동의 나그네의 발길은 토번 최고의 영웅이었던 33대 첸포인 송첸감포(松贊干布, 581~650)의 능묘로 향하였다. 현재 청게평야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20여기의 역대 첸포의 능묘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 중 역사적 비중 때문인지 역시 송첸의 것이 가장 거대하였는데 바로 그 곁에는 깊은 청게계곡의 절벽이 인적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송첸 왕의 업적은 소개한 바 있어서 여기서는 역사에 기록된 그의 최후의 날만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650년 여름, 티벳고원을 통일한 일대의 영걸이었던 송첸감포가 70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하고 서거하자 온 나라는 슬픔에 잠겼다. 평생을 첸포를 도와 나라를 일으켰던 명 재상 카르등첸과 유명한 학자 토미삼보다 등은 겨우 12세의 왕자를 보위에 오르게 하고 장례 준비에 들어갔다. 옛 조상의 땅 청게계곡의 길지에다 거대한 능묘를 파기 시작하여 다음 해 가을에야 성대한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이 때 당나라에서는 처남·매부의 도리로서 우무후(右武候)장군 선우(鮮于) 등의 대규모 조문사절을 보내 왔고 네팔과 기타 토번 치하의 서역(西域)의 군소국들도 역시 조문객을 보내 왔다. 능묘는 사방 각이 난, 피라미드 형의 작은 산만 하였는데, 안에는 5개의 묘실이 있어 가운데는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첸포의 관을 모셨고 그 머리 위의 중앙에는 신불상(神佛像)을, 좌측에는 평소 입고 전쟁터를 누볐던 갑옷을, 우측에는 황금으로 만든 말과 기사를 순장하였고 아래로는 수많은 진주를 놓아두었다.

그 외의 4개의 방에도 당·네팔·페르시아·천축·서역에서 보내온 진귀한 보석·비단·공예품·도자기 등을 부장하였고 주위에는 백여 마리 말도 순장(殉葬)하였다. 장례는 3개월간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 중에 온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얼굴에는 검은 회칠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애통해 하면서 보냈다. 최후의 날에는 묘실의 문을 닫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기관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린 왕과 5명의 왕비가 통곡하자 이에 따라 만백성도 같이 울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첸포를 도와 티벳문자를 만든 유명한 문장가 토미삼보다(屯彌桑布多)는 조사를 읽어 내려갔다.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연못 속에 빠졌으니 누구에게 마음을 줄 것인가? (중략) 성스러운 야라샹파산 꼭대기에서 태양은 허공으로 떨어졌고 밝은 보름달도 구름에 가렸으니 첸포의 용안은 이제는 다시 볼수 없구나. 영명한 이름은 시방세계를 덮었고 천계의 신령도 찬탄하여 마지않았는데 지금 신하와 백성을 두고 떠났으니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살 것인가?

조사(弔辭)가 끝나자 토번왕조의 수호신인 돌사자(石獅子)가 눈물을 흘렸고 하늘과 땅이 함께 울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당나라에서 시집온 막내 왕비 원청(文成) 공주의 통곡이 더욱 애처로웠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위정자들의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 이역만리 설역고원(雪域高原)으로 그것도 이미 늙은 임금에게 시집을 온 지 어느덧 9년이라지만 첸포의 출정기간 3년을 빼면 겨우 6년간을, 그것도 호랑이 같은 시앗들 눈치보며 살았는데, 이제 늙은 남편마저 먼저 가고 30살이 채 되지 않은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이후의 긴 세상살이를 누구를 믿고 살란 말인가라는 자기 신세타령이 섞인 울음이었다.

돌사자(石獅子)의 피눈물

원청 공주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들릴 듯한 천년 왕국의 폐허 속에 솟아 있는, 일대 영웅의 무덤 위에 땅거미가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기에 송첸의 능묘를 뒤로 하고 이번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린다는 돌사자를 찾아 건너편 산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산에 오르기 전에 해동의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얼마 전에 발굴되었다는 높이가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티데송첸(赤德松贊)의 비석이었다. 그것은 큰 길가에서는 앞의 산, 즉 능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에, 마치 누렇게 익어가는 밀보리밭 사이에서 돌연히 솟아오르듯 나타났기에 그것의 출현은 더욱 극적이었다. 왜냐하면 일전에 왔을 때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해 못내 섭섭해하며 발길을 돌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석은 얼마 남지 않은 토번시대의 금석문(金石文)이어서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이었기에 견고한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지만 다행히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거북등에 얹혀져 서 있는 그 비신(碑身)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였고 몇몇 글자와 용문양(龍紋樣)은 살아 있는 듯 선명하였다.

그 비각(碑閣)을 돌면서 토번제국의 흥망성쇠를 돌이켜 보고 있다가 다시금 산그늘에 쫓겨 돌사자를 찾아 서둘러 앞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숨이 턱에 닿을 때쯤에야 겨우 중턱에서 돌사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그 돌사자는 전설대로 과연 명물이었다. 비록 한 쌍이었던 다른 한 마리는 부서져 버렸고 자신도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상태였지만 청게평야를 등지고 오로지 능묘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 기상은 범상치 않았다. 마치 누군가 주인의 능묘를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공격할 것 같은 기상을 하고 있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이 생길 만한 영험 있는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이런 충복을 거느린 이 능묘의 주인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에 대하여는 앞의 삼예사원에서 잠시 소개되었지만 다시 한 번 더 독자들을 위해 사족을 붙여보기로 한다.

그는 토번왕국의 토대를 닦은 33대 송첸감포 왕의 5대손인 38대 티송데첸(赤德松贊, 754~797), 즉 티벳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불려지는 임금이다. 송첸에 의해 불교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다고는 하나 토착종교인 뵌포교와의 갈등으로 그 세력이 미미하던 시기에 그는 뵌포교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장려하기로 원력을 세워 파드마삼바바의 추천으로 지금의 삼예사원을 건립하여 ‘흥불서약비(興佛誓約碑)’를 세운 후 최초의 티벳인으로 된 승가(僧伽)를 만들고 불경을 번역하여 설역고원에 법륜이 굴러가게 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불교국가 티벳을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인 셈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외치(外治)도 눈부셨다. 763년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잠시 점령하였었고 돈황을 비롯한 서역의 대부분을 토번의 속국으로 만들어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국력을 가진 대제국을 이룩한, 티벳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대 설역고원에 빛나던 큰별이었다.

아마도 당연하리라, 그 찬란했던 주인의 영광을 곁에서 모두 보아온 돌사자가 지금 조국의 현실을 보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피눈물을 흘리는 것뿐이라는 것이….

석양의 잔광(殘光)이 비추는 돌사자의 뺨에는 정말로 피눈물 자국이 검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