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이 무너지랴

나의 인연이야기

2007-09-27     관리자

충남 연기군 운주산 자락의 금이산(金伊山) 계곡을 타고 올라가며 천 기(基)의 돌탑을 세우기로 작심한 스님을 지난 해 11월에 알게 되었다.
그 자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병(倭兵)을 피해온 난민들이 숨어서 목숨을 건졌다 하여 내생천(內生天)이라 불리기도 한다. 절의 이름은 아랫마을 송암부락의 이름을 따서 송암사(松岩寺)라 하는데 20년을 내다보며 착수한 이 절의 주지 숭의(崇義) 스님은 이제 돌탑 200여 기를 마쳤다.
처음으로 절을 찾아가던 날, 늦가을 짧은 해는 가는 동안에 어느새 져 버려서 전의(全義) 버스터미널에 다다랐을 때는 초저녁이었다. 스님은 찻머리까지 봉고차를 몰고 마중 나왔다. 차는 큰길을 얼마쯤 달리다가 밭고랑 사잇길로 꼬불꼬불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스님 옆자리에서 먼발치로 처음 올려다 본 절은 수많은 등이 환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꽤나 규모가 큰 사찰로 짐작되어 깊은 산중에 그렇게 큰절이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러나 막상 다다른 절은 반듯한 대웅전 하나 따로 없는 일반 살림집 같은 곳이었다. 법당과 주지실이 있는 윗채와 식당으로 쓰이는 아랫채가 절의 전모였다.
다음 날 아침 윗채를 끼고 오르는 느슨한 언덕길을 밟으면서 양 옆에 늘어선 크고 작은 돌탑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간밤의 등불은 초파일에 켰던 등이 전깃줄에 매인 채로 있었음을 알았다.
언덕길 끝에는 먼 산과 아랫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잔디밭이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산을 업고 산신각과 약사여래가 모셔진 약수터가 있다. 그런데 몇 개의 듬직한 돌탑이 숲을 막아서면서 산신각과 약사여래를 지켜주고 있다. 잔디밭 둘레에 늘어선 돌탑은 보면 볼수록 하나같이 부처의 모습을 닮아, 세운 이의 땀과 염원이 사무쳐온다.
산 중턱의 용왕(龍王)님을 모신 계곡에 이르러 탑은 묘하고 아름답게 변모한다. 그 위 지장각(地藏閣) 앞뜰에서 탑들은 더욱 강렬하게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민다. 세운 이의 염원이 중생의 믿음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고나 할까, 참배하는 사람마다 깊이 빨려든다.
돌탑은 올라갈수록 힘을 더하고 산길은 올라갈수록 가경(佳境)을 이룬다. 정상 가까이 마련된 연화대 터에 이르면 맑은 날에는 멀리 계룡산과 청주(淸州) 쪽의 팔봉산 능선이 마주 보인다.
언제나 연화대에 부처님을 모시게 될까 그 때를 가늠해 본다. 반반하게 닦아 놓은 넓은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지난 날 찾아다닌 절과 그 절을 둘러 싼 자연의 경관이 곧잘 떠오른다.
절집과의 인연에는 장소와 때, 사람 세 가지가 따른다. 젊어서는 그 중에서도 주로 사람이 앞섰으며 절과 그 주변의 자연은 뒷줄 섰던 것 같다. 말하자면 스님을 만나러 절을 찾았고 절에 가다보니 그 둘레의 산과 들을 거닐게 마련이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이 차츰 절이나 그 둘레 자연으로 기울었다. 송암사야말로 바로 이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이상향이다. 봄내 취나물과 쑥, 두릅이 덤으로 따라붙는다. 또 한가지 꼭 덧붙일 것은 스님과 탑이 동격이어서 탑이 스님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구한날 묵묵히 탑을 쌓는 스님은 바로 불심을 돌에 심는 힘겨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조성된 탑은 스님의 분신이다.
어느 날 나는 산신각에서 탑을 쌓고 있는 스님을 한동안 먼발치로 지켜보았다. 스님은 크레인으로 돌을 올려 탑을 이리저리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빛이 제법 따가운 5월의 오후 스님은 더 없이 거룩하게 비쳤다. 그렇게 해서 쌓이는 돌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룬다.
스님은 힘과 심미의식을 두루 갖추었다. 도대체 탑 하나를 세우는 데 드는 돌의 수는 얼마나 되며 돌마다 몇 번이나 들어 옮겨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한없이 힘이 드는 일이다. 작업을 며칠 계속하고 나면 손가락마다 성한 데가 없다. 언젠가는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면서 팔운동을 하기도 한다. 참으로 탑 쌓기는 고행이요, 기도요, 수행이자 설법이다.
정월에 대웅전 불사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탑 쌓기는 중단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처님께 세운 공이 미미하니 무슨 힘으로 불사를 하겠는가 반문하면서 병들고 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을 모아 밤낮으로 공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긴 병을 앓는 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심심치 않게 머물다 간다.
돈이 모이면 돈이 업(業)을 몰아오기 전에 양로원을 지을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요기를 할 수 있는 열린 식당부터 짓는 것이 꿈이다. 대웅전은 부처님을 모실 만한 품위 있고 실한 집 한 채면 족하며 화려한 겉치레는 필요 없다고 한다. 지난주에도 입원 중에 아내가 집을 나가 버려서 퇴원해도 갈 데가 없다는 사람을 맞으러 청주도립병원으로 가는 것을 보고 왔다.
숭의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몸소 실천한다. 스님을 알면서부터 부처님 마음이 고인 곳이 절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게 되었다.
마흔의 고빗길에서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의 이치로 내 영혼을 사로잡으시고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거창한 법명을 내려주신 운허(耘虛) 스님을 비롯하여 그 동안 저 법의 그 깊고 깊은 가르침을 총결산하는 자리에 숭의 스님이 존재한다.
이 곳 금이산 자락 ‘권터골’에서는 백제 절의 기왓장과 새끼손가락만한 금불상과 등이 녹아 내린 연대 미상의 손바닥만한 동좌불상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권터골은 백제 유민이 나라가 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역대 왕들의 제사를 지냈던 사당의 뒷자리다. 숭의 스님이 그 곳에 탑을 쌓고 절은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송암사를 알면서부터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을 새삼스레 되뇌이게 되었다. 그리고 식어가던 정성을 모아 마음밭을 갈려는 묵은 염원을 되살린다. 저물어 가는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서 은밀하게 칩거할 은신처쯤으로 생각하고 찾아든 두메산골에서 또 다른 만행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약사여래님 다기에 새 샘물을 올리고 정법의 무량광명이 온 누리에 퍼지기를 이 목숨 다하도록 빌겠노라 다짐한다.
지심귀명례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