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의 삶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안동 하회마을 심원정사 윤실상화 보살님

2007-09-27     관리자

맴-맴-맴… 최고조로 오른 짙푸른 녹음마냥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오히려 시원스레 한여름을 가르는 날.
때 아닌 청복으로 안동 하회마을 심원정사(深源精舍)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날은 마침 운문사 승가대학 학장이신 명성 스님을 비롯하여 강사스님들이 문화답사겸 심원정사를 찾은 날이기도 하다.
동리에서는 가장 잘 지어진 새 한옥인 심원정사 와담 옆에는 백일홍이 만발해 있고, 이미 청도에서 오신 스님들은 앞뒤가 훤히 트인 대청마루에 서 차담을 하고 계시었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있는 집의 모양새며 은은한 소나무 향기, 그리고 하얀 옥잠화마냥 단아하신 여덟 분의 스님들, 그리고 집과 꼭 닮은 안주인이신 실상화(實相華, 본명 윤용숙, 65세) 보살님은 참 잘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와도 같았다.
실상화 보살님이 이 곳 하회마을에 이처럼 아름다운 한옥 한 채를 짓게 된 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남편 보덕(普德) 류홍우(柳鴻佑, 올해로 41년의 역사를 가진 자동차 엔진 주요부품생산업체인 유성기업 회장) 거사가 이곳 하회마을 종가댁인 충효당의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족손(族孫)인데다, 류씨 문중의 뜻에 따라 풍산중·종합고등학교의 이사장을 맡아 하회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이곳에 한옥 한 채를 지을 것을 발원했고, 그 일을 부인인 실상화 보살님이 도맡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을 이어온 류씨 일문(一門)의 동족(同族)마을인 하회마을에 한옥 한 채를 짓는다는 것은 여느 마을에서 집짓는 일과는 많이 다르다.
그저 집터를 구하고 설계를 부탁하고 업자를 선정하고 제때에 대금을 치루면 집은 지어지는 것이려니 여겼던 것은 참으로 큰 오산이었다.
설계에서 감리·준공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문화재관리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마을 어귀의 첫머리 양명한 곳에 집터를 구하고 1988년 섣달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어렵사리 허가를 받아 집을 짓기까지 햇수로 꼬박 4년이 걸렸다.
그야말로 총도감(總都監) 노릇을 하는 동안 까맣던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세어버렸다.
집이 다 지어지기까지 마을 어른들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도움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충효당의 박필술 노종부님의 도움이 컸다.
모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특히 문화계 인사들과 두루 교분이 두터우신 노종부님께서는 우리 한국의 옛집에 관한 한 국보적 존재인 건축사학자 목수(木壽) 신영훈 선생과 인연을 맺어주셨다.
또 그로 인하여 경복궁 복원을 맡았던 인간문화재 도편수 신응수 선생님을 만나고, 문화재 설계 전문가로 30년 간 외길을 걸어오신 태창건축 박태수 사장을 만나면서 일은 순조롭게 풀려갔다.
우리의 전통한옥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실상화 보살님은 우선 한옥에 대한 책을 구해 읽고,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신영훈 선생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신영훈 선생은 늘 자상하게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으셨다.
예로부터 한옥에는 춘양목(울진·춘양 등지에서 나오던 소나무로 문양이 비단 같고 얼굴이 홍조를 띤 듯 색깔이 발그스름하며 재질이 단단함)이라 했던가.
집을 지을 목재로 춘양목을 구하는 일이며, 석재, 흙, 부재(副材)를 만드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 앞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성제(四聖諦)의 치유법으로 풀어나갔다.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했다.
원인을 파악하면, 문제 있는 곳에 해답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苦)가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었다.
당호(堂號)는 서하 임창순 선생이 지으시고, 일중 김충현 선생의 예서체에 철재 오욱진 선생이 양각을 했다. 그리고 누마루 기둥의 주련과 문패는 동방연서회의 오랜 인연으로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써주셨다.
“우주 법계에 두루하시는 불보살님, 하회마을에 집을 지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과 걸림이 없이 집짓는 일이 원만구족하게 회향하도록 하여주소서.
마하반야바라밀.”
집짓는 동안 하루도 마음속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발원문이었다.
집을 지어가면서 부처님의 명훈가피력(冥薰加被力)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부처님, 감사합니다”하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1992년 3월 14일,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 동리분들과 음으로 양으로 도움주신 여러분을 모시고 입택식(入宅式)도 원만히 회향했다.

숙세로부터의 선연(善緣) 공덕이었을까.
집은 참으로 잘 지어졌다.
심원정사를 찾는 모든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디에 내놓아도 좋을 만한 작품으로 오늘의 문화재가 탄생하였다고 칭송들이 자자하다.

귀일심원(歸一心源)에
환지본처(還至本處)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무루지복(無漏之福)을 누려지이다.

실상화 보살님은 심원정사(深源精舍)를 마음의 도량삼아 귀일심원(歸一心源)에 환지본처(還至本處)할 것을 발원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어머니가 지은 한옥』이라는 이름으로 심원정사 창건기를 펴내어 ‘새집’주인(남편 보덕 거사를 그렇게 이른다)께 봉정했다.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자신처럼 처음 한옥을 짓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사진작가 김대벽 선생이 사진을 찍고 실상화 보살님이 직접 글을 쓴 이 책에는 우리의 한옥예찬과 선대 조상님들과 바깥어른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손들에게 쏟고 있는 자애로운 마음이 책갈피마다 알알이 담겨져 있다.

내 평생화의 밑그림은 감사
실상화 보살님은 ‘내 평생화의 밑그림은 감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철저히 연기법에 기인한 세간사이다 보니 어느 것 하나도 상호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러하다.
대대로 신심 돈독한 불자 집안에 태어나 종교적 갈등 없이 부처님의 인연 바다에서 살게 된 것이 우선 감사했다.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늘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살아왔고, 류씨 가문에 시집와 결혼 삼십 주년을 전후하여 칠남매를 모두 성가시키고, 하회마을에 집을 짓고 풍산 류씨 본향(本鄕)에 환향(還鄕)하여 뿌리도 내렸다.
근면하고 성실한 남편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감사의 일색이었다.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처님의 정법을 호지하고 보현행자로서 보살의 길을 가는 ‘회향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새집 주인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993년 ‘재단법인 보덕학회’를 설립하였다.
법인의 이름을 지어주신 광덕 스님께서는 “재단법인을 설립한다는 것은 하나의 큰그릇을 만듦과 같은 이치”라 하시고는 “흔히 수행과 보시는 별개의 것인 양 생각하기 쉬우나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지혜도 함께 자라 지견(智見)도 열리게 된다”고 격려해주셨다.
1994년 첫 학술연구사업으로 『원효사상연구1』을 지원 발간하여 제 8회 인촌상 학술부문상을 수상하였고, 지금까지 한국불교 연구논총 발간·동국대 역경원의 팔만대장경 한글화 작업·월간 불광의 어린이날 부처님 그리기 대회 후원, 실상사 화엄학림 연구비 지원, 불교 어린이 지도자 연합 연수비 지원과 아울러 우리는 선우 청소년 수련비 지원과 대전 청소년 자원봉사센터 지원을 해마다 해오고 있고.
그 외에도 불교 사회복지 사업에 해당하는 일들을 꾸준히 지원해오고 있다.
그리고 올해 26년째를 맞는 불이회(不二會)의 모임은 참으로 소중하다.
평소에 같은 취미를 가지고 박물관 미술관 탐방을 같이 하던 몇몇 분(우연찮게 모두가 불자들이었음)들이 1974년 함께 모여 불이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취임, 불교에 대한 강의도 듣고 사찰순례도 하면서 사회복지시설을 후원해오다가 1986년부터는 불교계의 선구적인 일꾼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모으기로 하고 불이상(不二賞)을 제정, 매년 연구와 실천에 걸친 분야(1997년까지는 연구·장학·출가면학·실천 분야에 걸쳐 수상) 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1994년부터는 사단법인 여성문제연구회(1952년 창립 초대 회장 황신덕, 2대 회장 이희호…)의 제 5대 회장에 취임하여 여성들의 권익신장과 복지증진을 이끌어오고 있다.
1996년 정초에는 자신의 호를 딴 향산(香山)장학회를 설립했다.
불교계의 전문인재양성을 발원하며 마지막 회향처로 삼고자 해서다.

인생의 여백
그 동안 정말 천천히 걸었던 기억들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인생에도 휴식이 필요한 것인가.
지난 해 6월 위암진단을 받고 참으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자신의 집에는 IMF 한파가 없었지만 주위에 넘어지는 기업들과 가슴아파하는 이웃들을 보며 심한 가슴앓이를 해서일까.
다정(多情)도 병이 된다는 말과 함께 유마 거사가 앓았던 병을 실감하게 되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 모든 사람은 평등하구나.’ 그리고 ‘ 누구나 똑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것이로구나.’
‘지금까지 참으로 열심히 살았구나.
그러나 열심히 살다보니 거두고 마무리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구나.…’ 몇 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걱정하며 내려다보는 가족들을 보는 순간 ‘아, 이 분들이 바로 나를 옹위하는 불보살님들이시구나.
얼마나 많은 불보살님들이 나를 걱정하고 계신가.
이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챙겨야겠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번 수술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심지를 갈아끼운 것 같아 오히려 또 감사하며, 동양화에 여백의 미가 있듯 인생에도 여백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하리라는 생각도 했다.
‘무궁화꽃이 활짝 피었다가 꼭 오므라든 채 하룻밤 사이에 톡 떨어지듯 인생 또한 그렇게 회향 마무리를 잘 해야 하리라.’주위에서는 실상화 보살님을 복과 지혜를 두루 갖춘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이라고들 한다.
일곱 남매를 키우면서도 성내는 법 없이 아이들(집에 살아계신 부처님들)에게 항상 존대말을 썼다는 보살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꼭 돌아와 집에서 반갑게 맞이했다는 보살님.
바쁘게 일하고 돌아오신 남편에게 기운을 살리는 말로 예를 다하여 섬기신다는 보살님.
갖추어진 복안에서 항상 자신이 해야 할 불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보살님.
마음에 고(苦)를 심기보다 즐거움을 심는 보살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옮기시고도 아무런 상(相)을 남기시지 않는 보살님.
말의 힘을 믿는 까닭에 늘 진실한 말로 기운을 살려주시는 보살님.
항상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모든 이들을 불보살님으로 섬기며 수순·예경·찬탄·공경하고 감사하며 자애로움을 펼치시는 보살님….
지금 여기 이 시간을 제대로 살아온 보살님.
이 보살님이 우리의 관세음이자 보현보살님이 아니고 누구이시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