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여래장 사상의 인간관

특집/ 불교의 인간관

2007-09-27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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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 (禪心)은 초심(初心)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깨침의 마음도 우리가 불교에 처음 입문하며 갖게 되었던 최초의 환희심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그 동안 불교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만 타성에 젖어 최초의 그 기쁨을 계속 지니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초발심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모든 생명체가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는 『열반경』의 선언이다. 필자의 경우 불교 개설서에서 이 구절을 처음 접하였을 때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쇼펜하우어 등의 책을 읽으며 소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던 청년 시절의 필자에게 이 말씀은 구원의 소식이었다.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불성 사상은 이와 같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질책하거나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전해준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곧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 사상은 우리를 아득한 절망에서 구원하는 가르침이며, 삶의 질곡에서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광명인 것이다.
이러한 불성 사상은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적게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위무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에게 깊은 종교적 체험을 촉발시키고 궁극적인 해방의 경지를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작용하였음에 틀림없다. 불성 사상이 화엄의 철학에도, 천태의 교학에도, 선종의 가르침에도 그리고 정토교의 종교 체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불성 사상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근저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불교의 기본정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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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떠한 점에서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법화경』은 불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법화경』에서 갖가지 사람들에게 수기(授記)가 주어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보살에게만 수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문들에게도 나아가서는 천룡, 야차, 건달바 등의 신인들에게도 우바새, 우바이 등의 일반인에게도 그리고 심지어는 악인 데바닷타에게도 수기가 주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수기를 받지 못할 중생은 아무도 없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누구나 성불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수기는 업의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개념이다. 부처님께서 수기를 준다고 하여도 이것은 부처님의 초능력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 A의 현재 행위가 미래에 성불이라는 결과로 귀결될 것임을 통찰하고 이것을 밝혀 주는 것이 수기의 본 뜻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특정한 사람의 행위, 수행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대개 그 원인으로서의 현재의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면 미래의 성불로 이끄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법화경』의 일승(一乘) 사상에 함축되어 있다. 『법화경』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아들(佛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구별이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일불승(一佛乘)이다. 하나의 부처님의 길(佛乘)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 가족은 제각기 얼굴 모양이 다를지라도 가족으로서의 동질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동질성이 바로 성불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바탕이며, 후대에 부처님다움 즉 불성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것이다.
더구나 『법화경』에는 명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보살이 수기를 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어떤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들에게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저는 그대들을 존경하며 조금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부처님이 아니라 보살에 의해 수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절대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종종 절대적인 것은 초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월은 초월을 통해 얻어지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버려지는 것을 구분한다. 이분법, 이원론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을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로 간주하게끔 한다.
불교가 무상을 이야기하고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것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상을 이야기하고 무집착을 강조하는 것이 이 세상과 인간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교는 적극적으로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고 중생이 근본적으로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열반이란 바로 이 생사의 세계에 실현되어야 할 당위이며, 부처님이란 중생의 삶의 목표, 일상생활에 구현되어야할 삶의 방식인 것이다.
여기에서 절대적인 것은 무엇을 버리고 다른 무엇을 얻는 초월의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은 곧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이라는 말이 ‘공간적으로 어디에나, 시간적으로 언제나’라는 뜻이라면 부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또 과거·현재·미래에 한정되지 않고 언제나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 특정의 인격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안에도 계시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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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경』은 모든 중생은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이라고 하면서 이를 시든 꽃잎 속의 화불(化佛), 껍질 속의 쌀알, 빈천한 여인이 잉태한 전륜성왕 등의 여러 가지 비유로써 설명한다.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무량한 번뇌에 싸여 있는 법신’으로 파악하며 중생계와 여래장과 법신은 일계(一界)로서 여기에는 증가도 감소도 없다고 한다.
여래장이란 본래 ‘여래의 태아’라는 말이다. 마치 태아가 후에 성인이 되듯이 그리고 태아와 성인의 본성이 다르지 않듯이,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며 바로 이러한 인과관계에서 중생의 본성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래장 사상을 체계화하고 있는 『보성론』은 여래장으로서의 중생을 유구진여(有垢眞如) 즉 번뇌의 때가 묻은 진여라고 하며, 법신을 무구진여(無垢眞如) 즉 일체의 번뇌가 소멸한 진여라고 하여 이들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요체는 궁극적으로 이 둘이 진여라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데에 있다. 『보성론』은 이를 진여불이(眞如不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래장사상의 핵심은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인간의 마음은 외래적인 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있지만 본성적으로는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일견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이 말을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한 인간, 하나의 존재를 본질과 현상의 두 차원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가? 번뇌가 비본래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의 명제는 확실히 서로 다른 것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는 우리의 합리적 이성을 따르고 있다. 합리적 이성이란, 예를 들어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합리적 이성은 어떤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거짓 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의 상식도 이른바 과학적인 지식도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합리적 이성은 진실의 기준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이란 명제 또한 겉으로 드러난 표현 형식에서는 이러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여 발언된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합리성이란 모순, 대립, 갈등, 투쟁의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A와 not-A, 유와 무는 어느 하나가 있을 때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명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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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화두 가운데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가 유명하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여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없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일화의 전부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한 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고 물었을까? 아마도 그는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으며, 이를 사실로 믿고 있다. 그런데 내 앞을 지나가고 있는 저 개는 참으로 비루먹었구나. 아, 저 개도 중생이렸다! 그러면 저 개에게도 불성이 있어야 하나? 저렇게 비루먹은 개에게 신성한 불성이 있을 수 있나?’
이러한 의문은 유와 무의 대립을 전제로 한다. 동시에 이 의문에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서 비롯된 의심의 대립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조주 스님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그의 의문을 더욱 증폭시킨 것이다. 이제 그는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조주 스님의 말씀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부처님도 그렇지만 조주 스님도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유와 무가 대립하는 사고 방법을 버렸을 때일 것이다. 유와 무가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화평하는 세계, 그것이 깨달음의 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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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은 단순히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는 합리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自性淸淨心)과 미혹의 현실을 직시하는 우리의 자기반성(客塵煩腦染)의 대립을 촉발시키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대립은 우리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래장불성 사상은 이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