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 35.티베트의 역사가 시작된 궁전, 윰부라캉

수미산 순례기35

2007-09-27     김규현

원숭이의 후예인 ‘페’민족

티베트의 젖줄인 야룽장포 강 하류의 도시 제탕은 역사적인 곳이 많다. 특히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유적지가 많다. 먼저 민족의 탄생지와 최초의 사원이 있고, 최초 왕조가 시작된 궁전이 있고 역대 왕들의 무덤들이 있다.
다음날 아침 ‘페’민족, 즉 티벳민족 기원의 전설이 어려 있는 강포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것으로 역사탐방에 나서기로 하였다. 시내의 동쪽 산기슭에는 몇 개의 사원이 있었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한나절이나 오르니 정상 부근에 몇 개의 동굴군이 있었다. 바로 페민족 조상의 신화가 얽혀 있는 ‘원숭이동굴’이었다.

세계상의 여타 민족처럼 이 민족의 기원은 신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화치고는 너무나 ‘초과학적’이어서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근대 생물학이 겨우 밝혀낸 ‘인류기원설’을 이들은 이미 신화시대에 채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진화론적 기원설’을 창안하였다는 말이다.

자, 그럼 우선 먼저 ‘서장왕통기(西藏王統記)’ 등에서 전하는 그들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관음보살이 계시는 보타산에는 계율을 잘 지키는 원숭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보살의 뜻에 의하여 설역고원 야룽 계곡의 한 동굴로 와 수행을 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그 곳에 바위마녀가 나타나 선정에 들어 있는 원숭이를 보고 사모의 정이 생겨 같이 결합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행이 철저한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에 안달이 난 그녀는 말하기를, “그러면 나는 자결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전생에 이미 이번 생에 마귀에게 시집가도록 정해진 바, 만약 그렇게 되면 수많은 생명을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 그러니 마땅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에 진퇴양난에 빠진 원숭이는 관음보살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보살이 운명에 따르라고 말하자 이에 둘은 결합하여 6명의 자식을 낳았다. 3년 후 원숭이의 후예들은 더욱 번성하여 5백에 이르게 되어 숲 속의 자연적인 식량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오곡종자(五穀種子)를 수미산에서 얻어와 야룽 계곡에 심어 식량을 충당하였다. 그들은 점차로 번성하여 꼬리가 짧아지면서 사람으로 변해 농사를 지으면서 자손을 번창시켰다고 한다. 바로 이들이 페민족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을 현대 언어로 고쳐보면, 불교 전래에 따라 조금은 후에 각색되어졌다고 보이는, 관음보살과 관계된 고사를 제외하면 완전히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이 도시의 이름 ‘제탕’도 ‘원숭이가 노는 땅’ 이란 뜻이다.

이 전설도 이 설역고원을 돌아다니면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다른 의미 심장한 ‘초과학적 전설’, 예를 들어보면 히말라야가 바다였었다느니, 모든 생명의 시작은 물고기에서 시작되었다느니 하는 것과 사후 세계에 대한 해박한 과학적 지식 등등에서처럼, 이 티벳민족이 현재는 문명적으로는 낙후된 듯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천재적인(?) 과학지식을 가졌다는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한 예라 하겠다.

왕조의 출현지, 윰부라캉(雍佈拉康)

최초의 궁전으로 향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왕의 전설을 더듬어 보았다. 원숭이 6명의 자손에서 퍼져나간 페부족은 12부족으로 다시 갈라져 야룽 계곡을 중심으로 분산되어 부족 연합 형태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뵌포교라는 원시 샤만적인 종교의 사제들에 의하여 제정일치제(祭政一致制)를 이루며 살고 있었지만, 나날이 커져가는 부족들을 통솔할 강력한 통솔자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인식을 같이 하였다.

B·C 237년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최초의 첸포(王)가 출현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 날은 12개 부족장과 사제들이 모여 부족들의 앞날의 번영을 위해 아랴샹파 산의 제단에서 하늘굿(天祭)을 지내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을 한, 비범하게 생긴 어린아이가 그 제사 장소에 마치 땅에서 솟은 듯,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난 것이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부족장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만 그 아이는 말을 하지 않고 손으로 계속 하늘만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에 제일 연장자인 부족장은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하늘이 보내준 우리의 임금”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자 모두 이에 찬성하여 아이를 ‘어깨가마’를 태워 부락으로 데려와 성대한 잔치를 열어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네티첸포(攝赤贊普)라 부르기로 하였다. ‘어깨무등의 왕좌에 오른 임금’이란 의미였다.
뵌포교의 경전은 그를 색계(色界) 13대 천신의 아들이라고 신격화시켜 천신의 후예로서의 족보를 마련해 주었다. 「돈황본티벳역사문서」는 이 천신의 인간세의 강림에 이렇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일곱 겹의 하늘에서, 둥글고 푸른 하늘에서/천신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주인이신 우리의 임금이/티벳 땅에 강림하셨네./땅은 그렇게 높고 순결하여서/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영광이었네./믿음은 무엇보다도 그렇게 경이로웠네.”

하늘에서 내려온 이 아이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날 하루 모든 부족장을 모아놓고 의젓하게 말문을 열어 궁전을 지을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임금이 입을 연 것에 감격한 백성들은 즉각 공사를 벌여 일찍이 보지 못한 웅장한 왕궁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일좌 궁전인 윰부라캉은 건설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토번 왕조는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천여 년 동안 설역고원과 중앙아시아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초기의 6대 왕까지는 천신의 후예답게 지상에 묘지를 남기지 않고 승천하였지만 7대 왕 디굼첸포 대에 이르러 첫 반역 사건이 생기며 천상으로 올라가는 ‘신성한 끈(天繩)’ 이 끊어져 그 후로는 지상에 묘지를 남기게 되었다. 이 최초의 반역 사건을 역사와 전설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기록해 놓았으며 문학에서는 서사시로, 예술 분야에서는 벽화 또는 공연의 중요한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7대 왕인, 이 비극의 주인공 디굼첸포(止貢) 는 태어날 때부터 그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었는데 이름 자체가 ‘칼 아래 살해됨’이란 뜻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술시합을 좋아하였는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신성한 끈이 달린 천신의 옷과 무기’로 무장한 그에게는 적수가 없었지만 그의 약점을 이용한 소부락의 수령에 의해 마침내 칼 아래 이슬이 되고 만다. 로암다제라는 이름의 반역자는 왕의 도전에 조건부로 응락을 하는데, 그 조건이란 맨몸으로 상대하자는 것이었다.

무패를 자랑하던 기고만장한 첸포는 맨몸으로 결투장에 나타났지만 로암다제는 미리 준비한 황소떼를 풀어 먼지로 시야를 가리고 그 틈을 이용하여 화살로 쏜 다음 칼로 첸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신성한 왕통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천승(天繩)을 잃은 채 신화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슴다리 같다는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윰부라캉은 과연 신화의 일번지답게 범상치 않은 지기를 가진 곳으로 보였다. 해동의 나그네도 돌을 하나 주워 돌탑 위에 얹어 놓고 3층으로 된 내부를 둘러보았다. 정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 아래 펼쳐진 넓은 평원은 노란 곡식이 익어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석양의 누운 햇빛마저 비치고 있어서 온 세상이 ‘황금의 나라’처럼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신화 삼매에 도취되어 앉아있다 보니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무당의 자손이라는 단군할아버지가 처음 세웠다던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밑의 ‘신시(神市)’의 정경이 과연 이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