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법석] 혜초(慧超) 대사(大師)

보리수가 멀다고 근심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고 하겠는가

2007-09-27     관리자


혜초 대사(704~787)는 우리에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에 의해 돈황(敦煌)에서 발굴되어, 중국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함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다. 비슷한 시기 다른 분들의 천축 순례가 해로나 육로 한 곳이었던 데 비해 대사의 순례는 해로와 육로를 다 거쳐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의 명성이 너무 높아 혜초 대사의 다른 면목이 일반에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사는 중국 밀교의 대가인 금강지(金剛智)와 불공(不空)의 수제자로 법을 이은 분으로, 뛰어난 밀교의 수행승으로, 역경에 참여했던 석학으로 해동불교의 성가를 드높였다.
젊어서 당에 건너갔으며 그 이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727년에 쿠차국을 거쳐 733년 장안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아주 젊어서부터 서역과 천축국 순례를 시작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고 그로 미루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시기는 상당히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가 한다. 당에 도착한 대사는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해로로 인도 동부 해안에 도착해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했으며, 다시 육로로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 지방을 순례했다. 순례를 마치고 대사는 29세에 금강지의 제자가 되어 법을 이어받고, 역경(譯經)에 참여했다. 대사는 36세에 금강지가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담당하고, 경의 서문을 썼다.
70세에 이르러서는 불공에게서도 법을 이어받고, 그의 6대 제자 중 한 분으로 각광받았다. 중국 밀교의 개조인 금강지와 2대 조인 불공의 법을 이어 받은 분인 혜초 대사는 서기 780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역경과 정진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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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1) 남겨진 『왕오천축국전』은 나체국을 지나 쿠시나가라, 즉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에서 시작된다. 이곳에 관해 혜초 대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월에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폐해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이 조성되어 있다. 스님들이 머물며 관리한다. 매년 8월 8일에 사부대중이 모여 큰 불공을 드린다. 불공을 올릴 때 번을 세우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어 대사는 마갈타국에 도착하여,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을 한 녹야원(鹿野苑)에 도착하여 그 곳에 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 다음과 같은 시로 성지를 돌아본 감회를 적고 있다.

불려보리원(不慮菩提遠) 언장녹원요(焉將鹿苑遙)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보리수가 멀리 있다고 근심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수현로험(只愁懸路險) 비의업풍표(非意業風飄)
다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 험한 것을 근심할 뿐,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내 마음에 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아니다

팔탑난성견(八塔難誠見) 참저경겁소(參著經劫燒)
(깨달음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여덟 개의 탑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분명히 오랜 세월이 지나 불타 없어진 것이로다

하기인원만(何其人願滿) 목도재금조(目睹在今朝)
아 어찌 (깨달음을 구하는) 이의 서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깨달음을) 만남이 오늘 아침에 있도다.

2) 남천축국에 도착한 대사는 용수보살께서 야차신을 시켜 지었다는 사찰에 이르러 그 황량함을 보고, “용수보살이 계실 때에는 이곳 사찰에 삼천여 분의 스님들이 계셨다. … 지금 사찰은 황폐해졌고, 스님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고향 신라를 그리는 시를 남겨 놓았다. 이 시는 단순히 고향을 그리는 것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수행자가 사라진 황폐한 사찰과 고향 신라의 융성한 도량이 교차되며 수행자로서의 만감이 교차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야 ㅇㅇ 로(月夜 ㅇㅇ路) 부운삽삽귀(浮雲颯颯歸)
달 밝은 밤 (고향) 길을 (그리워) 하니 뜬구름만이 넘실거리며 돌아가는도다. (* 『한국불교전서』에는 월야 다음의 두 글자가 비어 있다. 그러나 뒤의 시 구절로 미루어 고향으로 가는 길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서참거편(感書參去便) 풍급불청회(風急不聽廻)
고향을 그리는 소식을 바람에 실려 보내려 해도, 바람은 내 청을 듣지도 않고 급히 달아나 버리는도다

아국천안북(我國天岸北) 타방지각서(他邦地角西)
내 조국은 저 하늘 북쪽에 있고, 내가 있는 이 나라는 세상 끝 서쪽에 있도다

일남무유안(日南無有雁) 수위향림비(誰爲向林飛)
이 해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날지 않으니, 누가 내 고향 신라로 날아가 소식을 전해주겠는가

3) 남천축국과 서천축국을 지나 북천축국에 이른 혜초 대사는 이곳에서 중국 구법 스님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이 산중에 나갈라태나(那渴羅汰娜)라는 사찰이 있다. 이 사찰에 중국에서 오신 스님이 한 분이 계셨으나, 이곳에서 입적하셨다. 그 분은 중천축국에서 왔고, 삼장(三藏)에 밝았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홀연 병을 얻어 입적하셨다 …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를 남긴다.” 이 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에서 생을 마친 나그네를 안타까워하는 대사의 마음과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입적한 수행승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대사의 마음을 표현한 시로 보인다.

고리등무주(故里燈無主) 타방보수최(他方寶樹催)
고향을 그리는 등불은 주인을 잃었고, (수행을 하던) 보배로운 나무는 만리타향에서 꺾이고 말았도다

신령거하처(神靈去何處) 옥모이성회(玉貌已成灰)
아 수행에 정진하던 고귀한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그 청정한 옥 같은 모습은 이미 재가 되어버렸도다

억상애정절(憶想哀情切) 비군원불수(悲君願不隨)
생각하면 할수록 애처로움 끊이질 않고, 그대의 (깨달음과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원)을 이루지 못함이 슬프기 그지없도다

숙지향국로(孰知鄕國路) 공견백운귀(空見白雲歸)
누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겠는가, 부질없이 흰 구름만 고향으로 향하는도다

혜초 대사의 저술
대사의 저술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왕오천축국전』은 발굴 이전까지 제목만 알려져 있다가 1권만이 발견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역경 당시 쓴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의 서문과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 등이 현존할 뿐이다. 더 이상의 저술은 제목이나 썼다는 기록조차 전하지 않는다.1)『왕오천축국전』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1권만이 전한다. 현재 전하는 내용은 동부 인도의 나체족 마을에 대한 여행부터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쿠시나가라와 바라나시, 왕사성, 죽림정사, 영축산, 부다가야, 대각사, 룸비니, 간다라 등을 거쳐 727년 끝이 난다. 『왕오천축국전』은 무엇보다 8세기 인도와 서역에 관한 세계 유일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남아있는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다섯 편의 시 중 세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시들은 녹야원과 남천축국 등지에서 쓴 시들이다. 이 시들은 혜초 대사의 감상이기도 하지만, 수행승으로서 불교 성지를 순례하는 감회를 적은 수행의 기록이기도 하다. 시를 쓴 배경에 관한 기록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왕오천축국전』은 잘 알려진 대로 혜초 대사가 남긴 필생의 업적이기도 하다. 서역과 천축의 상세한 기록과 순례 과정에서 보이는 대사의 성지 순례를 통한 정진(精進)은 많은 불자들에게 귀감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많이 알려진 책이지만, 새삼 『왕오천축국전』의 일부를 소개하는 이유이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3책 374쪽 ~ 381쪽에 걸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