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지킴이와 함께 걷는 달빛기행

오늘을 밝히는 등불들/경주 남산연구소 김구석 실장

2007-09-27     관리자

“와아! 달이다, 달!”
숲을 벗어나 산등성이에 오를 무렵 휘영청 떠오른 달빛에 모두들 환호성이며 감탄이 절로 쏟아진다.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 위에 탑이 서 있었던 거예요. 산 전체가 기단이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거지요. 그러니까 이 경주 남산 전체가 부처님께 경배하기 위한 하나의 탑인 거예요.”
늠비봉 석탑터를 향해 걷는 길, 김구석(남산연구소 실장, 48세) 씨의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진다. 한쪽에서는 외국 친구들에게 설명하느라 소근대는 목소리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리고보니 오늘은 유난히 사람들이 많다. 많아야 20명 가량 참여했는데 오늘은 50명은 되는가 싶다. 처음 참가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온 데다 경주 국제워크캠프(international youth festival)에 참여한 유네스코 협력동아리 학생들이 30명 가까이 동행한 까닭이다.
다시 손전등도 없이 산길을 걷는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잠시 버려두고 옛날 남산의 부처님을 찾아 참배했을 무명의 촌로(村老)처럼 그 옛날 정서로 되돌아가 부처님을 맞이해보자는 것이다.
저녁 7시 반 출발한 걸음이 10시 즈음에야 늠비봉 정상에 닿았다. 한낮의 더위가 남산 달빛 아래에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바람이 시원하기만 하다. 위로는 둥근 달과 아래로는 불을 밝힌 경주의 시가지 전경에 눈이 더욱 맑아진다.
“차가 돌아갑니다. 아마 옛날에도 남산 부처님을 참배하고 쉬다가 이렇게 대금을 불고는 차를 마시곤 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와 같이….”
산꼭대기의 바위 윗면을 깎아내 만든 자연스러운 기단이며 흩어진 탑재들에 대한 설명을 마친 김구석 씨가 정성스레 싸온 차를 돌린다.
김구석 씨의 십몇년 후배된다는 손수협(신라사람들 기획실장) 씨의 대금소리가 달빛 아래 낭랑하다. 누군가 지고 올라온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서로들 목청을 가다듬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노래가락을 뽑아낸다. 이때쯤이면 처음 자리해 서먹서먹하던 목소리들도 어느새 친근하게 다가온다. 조금 전 참배하고 올라온 유느리골 바위 속 부처님도 이 광경을 보고는 환한 달빛 웃음을 머금는다.
남산 달빛기행은 지난 ’97년 10월 김구석 씨와 허물없이 지내는 한 목사님이 제안하여 시작된 모임이다. 형식이나 조직은 없으며 매월 보름 즈음 달빛 아래 산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처님 땅’이라는 남산의 아름다움, 선조들의 지혜 등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회비는 1년에 엽서나 연락 등에 쓰이는 비용 형식의 1만원이 전부이며, 특별한 준비물도 없다. 먹고 싶은 간식을 가져와서 옆 사람과 나눠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남산 사랑모임 회장, 삼국유사 절터 찾기 모임 회장, 남산연구소 실장, 사진작가, 남산 지킴이….’ 이 독특한 남산 달빛기행의 안내를 도맡고 있는 김구석 씨를 지칭하는 또다른 이름들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참 욕심도 많네’ 하겠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라면 이 모두가 그의 마음 좋은 넉넉함 때문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모임을 만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을 해온 까닭에 떠안다시피 받아 안은 직함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 언제 왜 이런 일들을 시작하고 어떻게 해왔는지 그다지 잘 기억하고 있지 않다. 기억이나 기록 따위가 자신의 일을 무슨 큰 업적인 양 드러내기 위한 행위가 되지 않을까 내심 저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도 그 이름들 중에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은 다름 아닌 ‘남산 지킴이’다. 이제 남산에 관한 자료나 사진은 어느 도서관을 찾는 것보다 그에게서 찾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그의 집은 마치 남산 자료실, 남산에 관한 도서관 같다. 지난 4월 이사한 탓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책장의 반은 불교서적이, 그 반은 남산에 관련된 도서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손길을 기다리듯 꽂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별호가 되다시피한 그의 또다른 이름도 바로 ‘남산(南山)’이다. 남산 김구석.
“남산에 대한 연구가 없어요. 논문이라고 해봐야 50편 정도고 그 속에서도 불교와 관련해 발표된 논문은 확 줄어들지요. 불교쪽 자료로는 타계하신 고청 윤경렬 선생님께서 연구해놓으신 것 이상되는 것이 없어요. 제가 남산 안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직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니까 가능한 것이지요.”
그가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80년 남산의 불상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유는 단 하나 “이레 좋은 불상 남 보여줄려고”였다.
물론 그는 경주불교학생회 시절 (’69년) 도문 스님(전 대각사 주지, 현 대승사 회주)을 따라 법회 때문에 남산을 오른 바 있었다. 보광 스님(동국대), 법륜 스님(정토회), 법신 스님(룸비니 대성석가사), 김말환 법사는 그 당시 그와 함께 학생불교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던 경주불교학생회의 절친한 선후배이자 동기들이다.
그런 그이기에 경주 남산의 불상을 사진에 담기 시작하면서 누가 남산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면 그 자신의 일인 양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남산 관련 사진만 해도 수천 컷 넘게 찍어온 덕분에 사진작가로도 명성을 얻은 그이지만 그는 지금도 남산에 관한 사진만큼은 ‘남 보여주기’ 위한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고 있다.
그의 남산 사랑은 ’84년 경주불교학생회 선후배들과 함께 경주 남산의 부처님을 찾아 예배하고 금강경의 무주상보시 정신에 따라 남산답사안내는 물론 남산 쓰레기 줍기 등 남산 보존과 경주문화발전 운동을 펼치는 ‘부처님 마을’을 창립케 했다. ’87년에는 부처님 마을의 남산 답사안내 운동을 독립해 문화유적 탐방과 남산 홍보 등을 위해 ‘남산사랑모임’(매월 첫째 일요일)은 만들었다. 남산 답사를 통해 지켜본 폐사, 파불, 폐탑 등의 가슴아픈 모습은 또 매월 둘째 일요일 ‘삼국유사 절터 찾기 모임’을 통해 이러한 사례를 전국적으로 확대해 발굴, 확인해내는 활동으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한 그는 남산의 부처님들에 대한 안목을 넓히기 위해 ’91년 인도 순례 이후 네팔, 태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의 불교 유적순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20년, 그는 그 동안 700여 회,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남산의 부처님 앞으로 안내해 온 것이다.
지난해 경주시 유적관리사무소를 끝으로 20여 년의 공무원 생활을 마친 그는 올해 동국대학교(고고미술사학, 관광경영학) 졸업과 동시에 다시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제 보다 학문적으로 경주 남산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지난해 5월 남산연구소(http://www.kjnamsan.co.kr)를 개설했다. 남산 문화유적 총람, 경주의 문화유적, 지상강좌 등 아마추어의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망라해놓았다. 경주 남산에 관한 모든 것을 ‘남산연구소’에서 찾고 살펴볼 수 있다.
개설하고 1년 운영하는 데만 천여 만원이 들었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나있다. 그 동안 그가 펼쳐온 남산정화활동, 답사안내부터 올 12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남산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정리, 남산 보존에 대한 여론 수렴까지 이 공간에서 가능하리란 기대 때문이다. “그 동안 월급도 몰랐어요. 집안 살림은 가게(영화마을)를 통해 꾸려왔어요….”
오늘은 마침 부부가 2박 3일의 부처님 마을 수련법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남편을 이야기하는 부인 임숙희(자혜, 43세) 씨의 얼굴엔 서운함보다도 그에 대한 믿음이 역력하다.
불광법회 초창기 문수법등의 봉사활동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난 그는 김구석 씨의 변함없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다. 남산 안내자로서 때로는 그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각종 모임의 동료로서 김구석 씨는 올해도 벌써 7,80회는 남산을 오른 것 같다.
해발 49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남산을 오르는 사람들 모두가 골짜기 어디 돌조각 하나까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남산을 오르고 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