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 34.뵌포교의 사원,‘융중링(雍仲林)’

수미산 순례기 34

2007-09-27     김규현

전통 종교인 뵌포교(Bo"n po)의 쇠락

티베트의 역사는 어찌 보면 불교와 뵌포교의 ‘대립과 융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뵌포는 큰 비중을 갖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티베트가 완전한 불교국가처럼 보이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뵌포적 요소는 아직도 사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뵌포교의 불교화’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의 뵌포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우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 불교가 무속(巫俗)을 거의 융화시킨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렇듯 아직도 적지 않은 비중을 갖고 있는 이 뵌포를 살펴보는 것은 바로 티벳불교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하여도 필요하기에 자료조사차 거리의 ‘민족종교사무국’이라는 간판이 걸린 곳으로 무조건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그 곳은 뵌포교를 비롯한 군소 종교들의 라사 연락사무소였다. 가장 궁금했던 몇 가지를 물어 보았는데, 제일 먼저 한 질문은 “지금 전국에는 뵌포 사원이 몇 개가 있느냐?”였다.

사실 나의 이 질문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알려진 사실대로,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의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면서 전국의 모든 불교와 뵌포교의 사원들이 거의 파괴되었다. 그러니까 내 질문의 의도는 파괴된 숫자를 알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질문하면 대개의 경우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는 현재 백여 개가 등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수백 개였다는 대답도 자진해서 털어 놓았다. 예상보다는 많은 숫자였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이 숫자는 최근에 모두 복구된 것들이고 그것도 대부분은 일정한 사제들이 없는 작은 규모이고 다만 현재 십여 개의 사원만이 일정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하였다. 예상대로의 교세였다. 천여 년간 이 나라의 국교였으며 한때는 설역고원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까지 위세를 떨쳤던 뵌포의 현실은 쇠락, 그 자체였다.

사무국에서 비교적 교통편이 좋고 규모가 큰 사원을 하나 소개받아, 날을 잡아 길을 떠났다. 티베트의 제2의 도시인 시가체 못 미쳐 ‘다쥬카’라는 나루터에서 차를 내리니 마침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었다. 티베트 고원의 젓줄인 얄룬장포는 맑고 푸르렀다. 이 강은 뵌포의 히말라야를 따라 1,700km를 흘러 인도 벵갈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대하로, 히말라야 여신의 눈물 방울에서 시작된 ‘신화의 강 ’이다.

만자형(卍字形)의 융중링사

배에서도 빤히 보였지만,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던지 반나절을 걸어서야 도착한, 티베트 제일의 뵌포교 사원 융중링은 제법 당당한 모습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적갈색 산 기슭에 계단식으로 들어앉은 수십 채의 건물군은 흰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역사의 이끼 냄새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산 위로도 붉은 색의 작은 건물들이 여러 채 자리잡고 있었다. 대개의 티베트의 사찰들은 모두 산문(山門)과 현판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아무 길이나 가까워 보이는 곳을 택하여 경내로 들어갔지만 사원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들리는 것은 바람결에 날리는 오색깃발, ‘룽다[風馬旗]’의 펄럭임 소리뿐이었다. 애당초 요령이나 북소리 따위로 시끌벅적할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에 내심 당혹해하고 있던 차에 한 라마승과 같은 차림의 사람이 보이기에 사무소로의 안내를 청하였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삽시간에,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오듯 사람들이 모여들자 실내는 어느새 호기심을 띤 눈빛들로 가득 찼다. 나도 알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들 역시 외국인의 왕래가 드문 곳인지라 경계심과 호기심이 반반인 태도였다. 차를 몇 잔 마시며 소개장을 내밀고 허락을 받아 안내역을 한 명 앞세우고 ‘감포’와 ‘뵌포’란 직책의 고승에게 인사를 드린 다음에 내심 가장 궁금하였던 법당문을 열 수 있었다.

선입관에 의하면 그 안에서 무서운 형상을 한 뵌포교의 수호신들이 덤벼들 것 같은 자세로 이방인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법당 안은 오히려 담백하였다. 중앙의 법상에는 나무로 만들어 오색 단청을 한 ‘진리의 불꽃’만이 중앙에 안치되어 있을 뿐 예상했던 무서운 신중상(神衆像)들은 사방 벽면에 탕카, 즉 탱화 속에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만약 뵌포의 교리 체계를 모르고 왔었더라면 떡이나 의아해 할 상황이었지만 곧 그 ‘불꽃’이 이 종교의 최고의 구경채(究竟處)인 ‘초그첸’을 의미함을 알 수 있었다. 뵌포는 빛을 숭배하는 종교였기에 수행의 최고의 목적도 ‘초그첸’에 이르러 무지개빛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뵌포교는 대략 BC 2세기 대식국[大食國, 현 타지크 지방]에서 ‘센랍미우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옛부터의 샤마니즘을 체계화한 종교이다. 처음에는 중근동의 산악지대에서 번져나가다가 티베트 고원으로 들어와 카이라스를 구심점으로 한 옛 샹슝 왕국에서 만개하여 후에 토번 왕국의 국교가 되어 불교에 그 자리를 내어주기 전까지 천여 년간 설역 고원의 중심세력이었다.

이 곳 융중링사의 이름인 ‘융중’은 스와스티카(Swastika), 즉 ‘만자’를 뜻한다. 가람의 배치도 만자 형국이라 한다. 한때는 오백 명이 모여 살던 대찰이었으나 문화혁명 후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요즈음 다시 복구되고 있다 한다. 불교를 뜻하는 만자(卍字)가 시계방향의 우회전인 데 반하여 뵌포의 융중(卍)은 좌회전이다. 우리를 비롯한 전 불교권이 이를 혼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곳에서는 이 둘의 구별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렇지만 융중파는 뵌포교의 갈래에서 불교화된 뵌포, 즉 ‘백본(白本)’에 속하기에 샤만적인 면이 강한 보수적인 ‘흑본(黑本)’에 비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그렇기에 교리나 신앙의 상징 체계가 불교의 것을 많이 모방한 흔적이 엿보인다.

융중링사의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삼보론(三寶論)과 수많은 수호존을 들 수 있다. 불보는 교조 센랍의 보호신령으로 남신 15존과 여신 22존을 뵌포의 판테온에 배치하고 있다.

대개의 뵌포 사제의 활동은 무술·점복(巫術 占卜)을 고유기능으로 한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이 접신술(接神術)은 이들의 주된 기능의 하나로서 무아지경(trance)에 들어가 영계(靈界)와 교류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요령·동경(銅鏡)·해골북·인골피리(人骨笛)·피맛을 본 칼·짬바가루로 만든 인형·가면탈 등이 동원된다. 그 외에도 그들은 여러 방법으로 길흉화복의 ‘점’을 치거나 저주술(詛呪術)를 하거나 귀신을 쫓고 혼을 부르거나 때로는 병을 치료하는 일도 한다. 그들은 ‘하늘새’의 후손이기에 날개옷을 입어야 하며 대개는 혈족간의 세습이나 신의 간택에 의해 선택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간혹 전생제(轉生制)를 혼용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런 무속(巫俗)은 우리 한민족의 그것과 비슷하다. 아니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수천 년의 시간과 수만 리의 공간이 다른 세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문화현상이 일치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뵌포의 특징들은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보면 고파(古派)인 닝마파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계율이 엄격한 개혁종파인 게룩파 조차도 달라이라마 직속의 신탁(神託) 사원인 ‘내충’을 두어 국가차원의 무술 점복을 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고, 역대 달라이 라마의 결정권도 이들 신탁사원의 무술사들, 즉 무당(巫堂)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전래 종교인 불교는 토착화 과정에서 전통 종교를 포용하여 마찰을 최소화하였으며 뵌포는 고등 종교인 불교의 이론과 조직체계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하면서 서로 융화되었다. 바로 천여 년에 걸친 바로 ‘대립과 융화’의 역사였다.

해동의 나그네가 보고 싶었던 행사는 특정한 날에만 열린다고 하기에 지는 해에 쫓겨 다시 발길을 돌려 나룻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친을 이어 무당길에 나선, 내 안내를 맡았던 티베트 대학의 동문이라는, 그는 다음에 만나면 내가 듣고 싶어하는 해골피리를 불어주마고 약속하고 배터까지 따라와 배웅을 해주었다. 그가 접신삼매에 들어 춤을 추는 환영이 야룽장포 강 노을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그 광경은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