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빛으로 꽃필 때

보리수그늘

2007-09-27     관리자

 잠들기 전에 다들 그렇듯이 나는 어둠의 깊고 아늑한 침묵에 감싸인채 오늘 하루동안 지내온 일들을 되새겨 본다.

 최선의 진실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비굴하고 천박스러운 속물이 되지는 않았는지 자문하면서 자신을 가늠해 본다. 그러면서 과연「나」라는 사람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한 삶인가를 힘껏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 간다. 또한 자기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억압하거난 방해하곤 한다. 눈 앞의 현실적 이해타산에만 몰두하다보니까 점차 인간관계는 대립적이며 공격적으로 경직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시대의 땅과 하늘이 풍요롭고 밝은 생명이 빛으로 가득 차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있으며, 따뜻하게 포용하가나 용서하려는 용기가 없다. 다만 자기 생각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목적한 일이 잘 안될 때는 무작정 힘으로만 해결하려 든다. 너그러운 관용은 간데 없고 투쟁적 경쟁심만 남아 있는 것이다.

 돈과 출세와 허욕을 위해 인간의 근본적인 도의(道義)를 팽게치고 위선적이면서 비인간적인 행위를서슴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포악한 범좌를 저지르고도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롭기는 커녕 오히려 잘못을 은폐시키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가장 신성하고 순수해야 마땅한 결혼까지도 상대방의 상품가치를 따져본 다음 결정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음은 물질적 속물근성을 극명하게 들어낸 경우라고 하겠다. 우리가 아무리 싫어한다 해도 우리는 얼마짜리 몇점짜리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육체적 순수성과 존엄성이 파멸되고 있음에 서글프다 못해 비참하고 두렵기만 하다.

 행복한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불행한 인간이 되겠다던 우리의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만일 우리가 인간의 참된 본성을 되찾고 좀더 행복한 이상향을 희망한다면 사회적 지위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시대의 방관자가 아닌 동참자로서 훗날 후손에 전할 유산을 창조하는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개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며, 끊임없는 성찰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 나는 물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을 주창한 노자는(老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며 아기의 천진무구한 모습과 더불어 물을 도(道)에 가장 가깝다고 했다. 즉 천지간 만물 중에 가장 도를 잘 따를는 것은 물이며,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체 다투는 법이 없이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 있으므로 상선(上善)이라고 한 것이다.

 물은 부드럽고 그 유연성이 추악한 갈등이나 다툼에 멀리 있고 항상 본성을 유지한다. 둥근 그릇 속에서 는 둥근 모양을 하고 모진 그릇 속에서는 모진 모양을 갖춘다. 더우기 끊는다 해도 혹은 얼린다 해도 물은 역시 물이니 그   부드러움과 유연한 본성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강하다 하겠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헷세의 작품「싯다르타」에서도 뱃사공이 강물을 관조하면서 도를 깨치는 장면이 나온다. 물의 순수성, 자연스러움 그리고 혼탁한 세상의 어느곳이든지 순환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끝없이 흐르는 물의 우주적인 리듬 ! 그토록 부드럽고 넉넉한 꿈과 깊고 맑은 영혼 !

 우리는 이렇게 물이 주는 무언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더럽혀진 인간성의 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지고지순한 이상의 세계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항상 물의 본성을 쫓아야 할 것이다.

 혼란하고 암울한 시대일수록 우리들의 참된 지혜와 굽힐줄 모르는 담대한 용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들녘의 꽃처럼 열심히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밝은 빛을 향해 봉우리를 터트릴 때, 우리는 성실과 인내로 빚어진 행복을 찾게 되지 않겠는가.

 오늘 밤, 나는 우리 모두가 이 땅과 하늘의 물빛으로 환히 꽃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