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설법/미얀마 사야도 우 빤디따

2007-09-26     관리자

오늘 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길은 책이나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관찰을 통한 실제적인 지혜를 얻기 위해 초보 수련자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관찰 수행법이 마음을 배에다 집중하고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훈련이다.
여기서 주먹을 꽉 움켜 쥔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주먹을 움켜 쥐기 전에 움켜 쥐고자 하는 생각 또는 의도가 우선한다. 이 의도의 과정을 ‘의도’ ‘의도’ 하고 계속 마음 챙김을 해보면 이것은 한 두 번의 순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일련의 생각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의도의 생각들이 ‘namakaya(정신적인 몸 또는 무더기)’이다. namaka-ya의 존재는 경험적인 지식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신이 의도하는 대로, 손가락을 서서히 구부리면서 주먹을 움켜 잡을 때, 매 순간마다의 동작을 ‘구부림’ ‘구부림’ ‘움켜쥠’ ‘움켜쥠’ 등으로 마음챙김을 하며 주시해 보라. 이 동작들은 천천히 행해져야 한다. 이렇게 구부리고 움켜 쥐는 것과 같은 물질적인 요소를 ‘rupakaya’ 또는 ‘ rupakkhandha(물질적인 몸 또는 무더기)’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당신은 중생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무더기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주의력이 결핍된 사람이면 ‘손가락을 구부린 자는 나다’ 또는 ‘손가락을 구부린 것은 나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하여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내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에 빠지게 된다.
움직임의 과정 중에서 고통스러움, 뜨거움, 딱딱함, 긴장 또는 여러 다른 감각들을 느낄 수 있는데, 당신은 이것들을 놓치지 말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현상들이 일어날 때 이것들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을 할 때만이 현상들의 참 성품이 nama(名)와 rupa(色)의 복합체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이란 명과 색의 성품이 발현된 것으로 다른 말로 하자면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이다. 명과 색에 마음 집중을 해 보면 의식과 육체의 결합이 사람, 존재 또는 개인이 아니며, 그러므로 ‘나’ ‘나를’ ‘나에게’와 같은 말이 부당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자아 또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를 흔들어 놓는다.
명과 색에 관한 앎은 내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를 뿌리뽑고 원인 ― 결과, 즉 인과법을 알게 한다. 존재에 대해 이러한 참된 앎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헛된 생각과 견해들을 초대하고 융숭하게 대접하게 된다. 수행한다는 것은 당신 자신과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 노력하는 것이다.
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작용한다.
①소리: 타자(rupakaya=色蘊)
②귀: 수용기(色蘊)
③이식(耳識), 촉(觸)과 수(受): 점화(namakaya=名蘊) 만약 당신이 집중력이 뛰어나다면 위의 세 가지 요소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현상들의 참 성품인 명온과 색온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라는, 개인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버릴 수 있게 된다.
어느날 와지라 비구니에게 죽음의 신인 마라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생겨 났는가? 누가 그를 창조했는가?”
그러나 와지라는 마라에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왜 당신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나요? 마라, 당신은 잘못된 전제로부터 시작하는군요. 거기에는 수많은 과정들이 있을 뿐 ‘사람’이라는 실체는 없어요. 우리가 여러 가지 부품들을 조합한 것을 마차라고 부르듯이 여러 요소들이 나타난 것을 보통 사람이라고 부르긴 합니다.”

잘못된 견해의 결과
무지: 마음챙김을 하지 않으면 사물의 참성품을 꿰뚫어 볼 수 없고 망상과 동의어인 무지에 의해 정복당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지혜의 부재로 인해 잘못된 생각들을 하게 된다.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 자아 개념은 우리를 자만심으로 인도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사물을 보고 듣는 jiva atta라고 불리우는 생명의 근원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기까지 한다.
마음챙김을 하지 않으면 무지에 의해 정복당한다. 이것은 또한 갈망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즉 무엇을 보고, 듣기를, 또는 보고 들은 것을 갈망한다. 갈망이 증가하면 집착으로 변한다.
부처님께서는 무지에 사로잡힌 자가 육체적으로 눈 먼 장님보다 불쌍한 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를 알 수 있으나 영적으로 눈 먼 사람은 사악한 행동이 단지 쓰디 쓴 열매만을 맺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느낌: 마음챙김을 하지 않으면 유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감각이 발생할 때마다 갈망이나 분노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느낌이 갈망이나 분노를 야기시킴을 의미한다. 이 둘은 모두 유해한 정신적 상태이다. 느낌의 근원을 추적하면 거기엔 무지의 동의어인 망상이 있다.
보통의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쉽사리 보고 들은 것에 의해서 번뇌의 물결에 휩싸인다. 그 물결은 천천히 또는 빠른 속도로 흘러 넘친다. ― 때로는 폭포수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역자 주: 내가 있다는 망상에 의해서 감각에 대한 느낌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던 셀 수 없이 많은 견해들과 이론들 중에서 가장 판단을 그릇되게 하고 인류를 미혹 속에 빠뜨린 것은 나라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믿음, 또는 자아 ― 환상이다. 이 이론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세상을 풍미해왔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①영원론: 인생을 구성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과정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리하여 죽음 후까지도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자아, 영혼이 있다는 믿음.
②단멸론: 정신적·육체적 과정들을 나, 자아로 동일시 한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내가 소멸된다고 믿는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내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파생된 견해들이 62가지나 있다.

진실한 법을 깨닫는 지혜
예를 들어, 앞에서와 같이 손을 움켜 쥐거나, 팔을 구부린다고 가정하여 보자. 두 경우 모두 우선 손을 움켜 쥐겠다는, 그리고 팔을 구부리겠다는 정신적인 의도가 선행한다. 그런 다음 그 의도의 결과로서 손을 움켜 쥐고, 팔을 구부린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단계 단계마다 마음챙김하여 관찰할 수만 있다면 그 동작 뒤에 ‘나’라는 사람이 따로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참성품을 이해하게 되면 더 이상 어떠한 잘못된 견해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명온과 색온을 알면 잘못된 견해로부터 즉각 해방될 것이며 나아가 깨달음의 첫 번째 도와 과의 단계인 수다원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책이나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을 ‘진실한 법을 깨닫는 지혜’ 또는 ‘통찰의 특성을 가진 지혜’라고 한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은 현상의 특성들은 아래와 같은 두 개의 범주로 나뉘어진다.
①그 현상에만 유일한 또는 특수한 특성들: 긴장, 뻣뻣함, 열기, 초조함 등.
②모든 현상에 공통되고 보편적인 특성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이 두 가지 특성을 알 수 있을 때 인과법도 알 수 있게 된다. 명확하게 통찰하여 확실하게 이해하면 무지와 방황 그리고 의심을 털어 버리게 된다. 의심을 극복한 사람에겐 믿음이 생겨난다. 사물의 진실한 성품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이해가 기반이 되어 생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이러한 합리적인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교사는 신뢰를 받을 것이다. 마음챙김을 통하여 명색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 또는 지혜이다. 상상으로 이끌어 낸 지식은 사람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 뿐이다.
마음챙김의 수련(위빠싸나)은 진실한 법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행법이다. 이것은 우리를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 중의 하나인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