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나이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부산 영광갤러리 이경순 실장

2007-09-25     관리자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말이 듣기 좋아요. 그 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뜻이 아닐까요. 인생으로 볼 때 앞으로 5년간은 제 인생의 황금기가 될 것입니다. 정말 잘 보내야지요.”
돌이켜보건대 앞만 보고 정말 열심히 달려온 삶이었다. 처음 시집 와 세 평 남짓한 영광도서에서 책정리하고 책표지를 싸며 최선을 다해 친절을 베풀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우성을 치던 자신의 모습. 친정식구 7남매에 시집식구 9남매의 한 일원으로서 도리를 다한다는 것도 녹녹치 않았다. 게다가 두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아들 딸 걱정에 사회활동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힘든 줄도 몰랐고 그것이 행복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장(玉華藏) 이경순(49세) 실장(영광갤러리)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가.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정말 나는 내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그때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선뜻 다가온 것이 연꽃이었다.
“고요를 깨뜨리는 순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새벽의 연꽃과의 만남은 내게 생명력이 되었고, 태양 아래 하늘을 향해 당당히 앉은 연의 모습에서 인간사의 번뇌가 한낱 시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른 새벽 부산시 두구동, 전주시 덕진 공원, 충남 아산 인취사, 경주시 서출지, 경북 경산시 연못에서 렌즈 속 자연과 연꽃과의 만남은 어느새 이경순 실장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연꽃의 순결한 자태가 바로 인고의 결실임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그것을 카메라 렌즈에 한 컷 한 컷 담기 시작했다.
1968년 부산시 서면 로터리 복개천 도로변 1.5평으로 시작한 영광도서는 현재 판매장 800여 평의 단일건물로 확장, 서고 관리부 600여 평의 대형서점으로 부산 사람이 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명소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영광도서의 오늘의 영광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부산에서 가장 번화가라고 하는 서면 로터리 일대가 유흥가로 변하면서 서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흥가 금싸라기 땅에 대형서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책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30년 이상을 말뚝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버텨온 덕에 이제는 영광도서 주변이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현재 정비작업 중이다. 진흙 속에 핀 연꽃이 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지로 영광도서는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1993년 2월 자체 건물 지하 1층 70평에 마련된 ‘사랑방’은 독서토론회, 저자와의 대화, 한문학당, 서예학당, 풍수지리강좌, 일본어강좌 등 자체 행사는 물론이지만 문화와 관련있는 행사면 무료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998년에는 4층의 매장 중 40평을 뚝 떼어내 갤러리로 만들어 무료전시 공간으로 열어두었다.
“남편 김윤환(52세, 영광도서 대표) 씨는 사업을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방편으로 삼지 않고 문화행사와 봉사와 교육에 재투자하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독서인구의 저변확대와 이윤의 사회 환원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사실 영광도서가 오늘에 오기까지 역시 부산시민들의 공덕이 컸던 것만큼 그 공덕을 시민들에게 바로 돌려줄 수 있어야지요. 선인선과(善因善果)라 하지 않았던가요.”
백여 명 남짓 직원들이 함께 꾸려가는 영광도서 역시 지난 몇 년간 불황의 여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직원들은 자진감봉과 인력감축을 단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 열심히 뛰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10명이 할 일을 5명이 하게 하면 가시적인 인건비는 절감될 지 모르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진 10명이 어찌 20명 몫을 못할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국의 대형 서점 중에서 매장 내에 불교서적 코너가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도 바로 이곳 영광도서다. 1987년 대한출판유공자 표창에 이어 1995년에는 대한출판협회로부터 자랑스런 서점 경영인상을 수상했다.
“30년 가까이 한결같이 저를 믿고 영광도서를 지킨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3평의 서점에 아이를 유모차에 뉘어 놓고 서가를 짜고 무거운 책을 나르고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상냥하게 고객을 맞이하던 그 공덕이 오늘 영광도서의 구석구석에 은혜처럼 자욱히 녹아 있어요. 1인 3∼4역을 묵묵히 해낸 아내의 노력이 일군 성과지요.”
오늘날까지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을 할 정도로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남편은 1998년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참여한 한 교육프로그램에서 유언을 쓰게 되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부터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라.”
그 한 마디에 그 동안 남편에게 섭섭하게 생각되었던 마음이 봄눈 녹듯이 녹았다.
순수한 아마추어로 연꽃사진을 찍는다는 이경순 실장은 대단한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큰 어려움 없이 즐겁다고 한다. 전시회 또한 마찬가지다. 그 동안 카메라 렌즈에 담아온 사진들을 보여드리고 오셔서 보시는 분들이 좋아해서 좋고….
이경순 실장은 “사진을 찍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하면 그는 서슴치 않고 “49년간 했노라”고 말한다. 경력으로 보면 48년간 본 것을 2년간 꼬박 찍었다는 표현이 좀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한 장에도 그 사람의 삶이 농축되어 표출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옥화장 이경순 실장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한정식 교수는 그의 사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사진에 드러난 그녀의 인품은 온화해보인다. 사진에 잔재주가 보이지 않는다. 대상을 대상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면서 자기 내면으로 감싸 재현시켜내는 그 솜씨가 정직하고 순수하다.”
그의 사진은 그의 성품대로 은유적이기보다 솔직 담백하다는 평이다. 그리고 아마추어 솜씨를 넘는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지금까지 부산에서 두 번의 전시회를 하고 사진집 ‘연옥(蓮玉)의 담(談)’을 펴낸 이경순 실장은 세 번째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이번 전시회는 흑백 연꽃사진이 주작업이 될 것이다. 이중인화를 통해 연꽃 속에 부처님이 나투고, 향로가 있고, 불교의 여러 상징물들이 함께 보여지는 기법들도 현재 실험 중이다. 현재 군대에 가 있는 아들이 사진을 전공하고 있는 지라 좋은 대화자이자 도반이 되고 있다는 이경순 실장은 그의 연꽃사진만큼이나 참 편하고 좋은 사람이다. 새로운 연꽃으로 피어날 그의 가을 전시회가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