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레의 보왕삼매론

엽편소설

2007-09-25     관리자

‘저 녀석들 또 시작이군.’
침대에 누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명수 씨는 위층 아이들이 쿵쿵 뛰어 노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쿵쿵. 와당탕…. 콩콩콩….”
소음도 여러 가지였다. 명수 씨는 그 소음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의 일거일동을 상상하려 애쓰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수마의 달콤한 유혹은 그의 의식을 포근하게 감싸안기만 했다. 지루한 수업시간의 강의처럼 그 소리는 들을수록 잠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명수 씨는 머리맡에 붙여놓은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의 구절을 천천히 외우다가 이내 깊이 잠들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聖人)이 말씀하시기를 병으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집 위층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곳에 살던 노부부가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여생을 보내겠노라며 짐을 꾸릴 때만 해도 명수 씨는 아파트의 소음이 그토록 심각한 줄 몰랐다. 간혹 그런 소음의 고통을 털어놓는 친구가 있어도 남의 일인 듯 별로 실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일로 이웃간에 금이 갔다거나 아니면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투신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다는 친구의 말이 모두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다섯 살과 세 살인 아이들을 데리고 위층에 이사를 온 집은 첫날부터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처음 사나흘은 이사짐을 정리하거나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들의 뜀박질은 더하면 더했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을 가로질러 와당탕 왕복 달리기를 하는 건 예사였고 단단한 공을 굴린다거나 소파에서 뛰어내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 천장에 진을 치고 먹이를 물어 나르는 쥐 떼들 같았다.
“저 집 사람들은 아파트 생활이 처음인가? 왜 이렇게 시끄럽지?”
어느 날 명수 씨가 잠자리에 들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아내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두 아까 위층 여자가 찾아왔어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이해를 해 달래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렇대요.”
“어려두 그렇지. 남들 잘 시간에 이렇게 떠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는 쥐 떼들 같은 소음의 책임이 아내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질을 부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 뒤로 여러 날이 지나갔다. 위층의 소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니까 그러려니 싶어 명수 씨는 그 고통을 되도록 참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참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어서 어느 순간 그의 인내력은 한계점에 이르고 말았다.
경비실을 통해 몇 차례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을 했음에도 전혀 고쳐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오히려 그로서는 생면부지의 위층 여자가 인터폰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왜 자꾸 밤늦게 인터폰을 하시죠?”
그녀는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스스로 찾아와 아이들의 소란함을 이해해 달라던 태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조용히 해달라는 이웃의 부탁이 그렇게나 못마땅한 것일까. 명수 씨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아주머니 말대로 밤도 늦었는데 조용히 잡시다. 댁들이 이사온 뒤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어이가 없어진 명수 씨가 이렇게 대답을 하자 위층 여자는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은 채 다시 억양을 높였다.
“아저씨가 잠자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내 집에서 내가 생활하는데 왜 그쪽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예요? 앞으로 인터폰 하지 마세요. 아이들 스트레스 받아요.”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금메달 감이다.
“아주머니, 여긴 단독주택이 아니구 공동주택입니다. 댁들 혼자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데서 살면 그 정도의 예의는 상식적으로 지키는 게 마땅하잖습니까? 제발 아이들 좀 조용히 시켜주세요.”
명수 씨가 이렇게 말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하자 그 여자는 다시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아저씨! 우린 아이들 기죽이고 싶지 않아요. 정 그렇게 시끄럽다면 서로 층을 바꿔 살면 될 거 아녜요?” 그 순간 명수 씨의 인내심은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는 겁니까? 교양이라곤 손톱 밑의 때만큼도 없는 여자로군.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더니 뭐 아이들 기가 어째요?” 하면서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층 여자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던 명수 씨는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다시피 했다. 마지못해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그 여자의 항변에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웃 사촌이라는데 그 정도쯤 이해를 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항변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이웃을 생각한다면 그토록 상식을 벗어난 언행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더욱이 아직 어린 자식들의 기를 꺾고 싶지 않으니 당신들이 이해를 해달라는 말에는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 분노가 효과를 보았는지 위층의 소음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자 이번엔 명수 씨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엘리베이터에서나 단지 안에서 그 사람들과 마주칠 때의 일이 걱정이었다. 먼저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면 두 번 다시 그런 언어도단의 항변을 하지 못하도록 일침을 가해야 할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소위 불자(佛子)입네 하며 꼬박꼬박 법회에 동참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심도 적지 않았다. 생사대사를 깨닫겠다는 발원이나 보살행을 실천하겠다는 서원은 그만두고 스스로의 마음이나마 잘 다스려 보겠노라는 다짐으로 불법(佛法)을 접한 지 20여 년 가까이 되는 내가 고작 이 정도인가 싶었던 것이다.
수천 번이나 삼귀의와 사홍서원, 육바라밀을 읊었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스님들의 법문을 들었음에도 기껏 이웃집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조차 참지 못하는 삼독심이라니…. 명수 씨는 그만 자신의 신심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 정도로, 스스로의 마음 하나 제어할 수 없는 신심이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 아닌가.
물론 위층에서 내는 소음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정말 심각한 것이었다. 제 자식 기죽이고 싶지 않다는 위층 여자의 자식사랑도 비뚤어진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작은 어려움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너그럽지 못한 도량은 무엇인가. 그런 자괴심을 떨치기 위해 명수 씨는 술을 마셔보기도 했고, 인터넷방에서 늦도록 게임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위층에 대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명수 씨가 ‘보왕삼매론’을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오래 전의 특별 법회 때 큰스님이 그것을 주제로 법문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자료를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책갈피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보왕삼매론은 한마디로 자신에게 놓여진 역경(逆境)을 달갑게 받아들여 그것을 수행의 바탕으로 삼으라는 성현의 가르침이다. 그 귀중한 가르침을 명심하여 실천한다면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 것인가. 명수 씨는 그 말씀을 접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끼며 무릎을 쳤다.
그리고 명수 씨가 그토록 걱정을 하던 위층 사람들과의 조우는 바로 그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이루어졌다.
“저어. 아래층에 사시나요?”
“그렇습니다만….”
“죄송합니다. 밤마다 너무 시끄럽지요?”
“아, 네에~. 저도 지난번 일을 사과드립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말을 심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명수 씨는 위층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득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다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성인은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명수 씨에게 위층 아이들의 우당탕 뛰어노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