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반항과 애교

징검다리16

2007-09-25     관리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보살님 한 분이 두 딸을 데리고 서운사를 방문했다. 마침 겨울방학 중이라 서운사에서 며칠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깔끔한 성격에 책임감이 강한 보살님은 두 딸아이를 무척이나 예쁘고 예의바르게 키운지라 한 번쯤은 떼를 쓸 법도 한 디즈니랜드와 같은 장난감 인형가게에서도 아이들은 절제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얼마 안 있으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둘째 아이는 마치 세 살이나 네 살짜리 얼굴처럼 마냥 귀엽고 애교스러웠으며 지나가던 미국 보살님들마저도 귀엽다는 인사를 던질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둘째 아이의 귀여움은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성장발달을 방해하는 요인과 맞물려 있었다. 우선 식탁에서 다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개념의 부족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는 엄마나 언니보다 더 많이 먹으려는 급함을 보였다.
식사량은 나이에 맞았지만 식사하는 매너는 서너 살의 어린이들이 주로 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적 행동을 보여주었다. 외출을 할 때도 옷 입는 것은 물론 양말과 신발 신는 것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어머니나 언니가 도왔다.
그리고 누가 자기 언니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하면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즉각 끼어들어서 자기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고 자리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은근히 언니를 밀어제치고 상황 상황마다 자기가 항상 관심의 초점이 되고자 할 뿐 결코 언니의 존재나 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가 워낙 귀엽고 애교스럽게 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그냥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싶은 반응이 먼저 일어나지 뭔가 자기연령에 맞지 않는 미숙한 발달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 가운데 하나가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 사이에 끼어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병이 난 사람을 치료해주는 일도 훌륭한 일이지만 병이 나기 전에 미리 예방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도록 상담해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괴로움의 원인이 싹터서 고통의 열매를 맺기 전에 괴로움의 씨앗을 먼저 발견하고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사전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서 나는 보살님과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 보살님의 이야기는 둘째 아이를 낳았던 8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맏며느리인 보살님이 둘째 딸을 낳았을 때 첫째 딸과는 달리 시부모님이 노골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부가 의도적으로 둘째 아이를 편애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친척들이 언니라고 첫째 아이에게 세뱃돈을 더 주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매사에 언니이기 때문에 동생에게 양보해야 되고 돌봐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동생이 언니 말을 따르거나 존중해야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여덟 살이 되도록 아버지가 둘째 아이의 대변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아무튼 딸 많은 집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집안의 중요한 존재로 군림했던 오빠에 비해서 갖은 애교와 애착된 행동으로 겨우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물론 오빠보다는 덜 소중한 존재로서) 보살님은 둘째 딸을 반기지 않는 시부모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자신의 아동기 경험이 자극되면서 분노가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살님은 딸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는 갓난쟁이 둘째 딸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애처롭고 서럽고 분노스러웠던 것이다.
마침내 둘째 딸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면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으로 둘째 딸을 불쌍히 여기고 애처로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점점 자라서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들어갔는데도 보살님의 눈에는 항상 콜라캔도 스스로 열어서 마시지 못하고 자동차 문도 열지 못하고 옷도 스스로 입지 못하고 양말도 혼자서 신지 못하며 심지어는 화장실 볼 일 보고 궁둥이도 혼자서 못 닦는 애기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 아이의 학교생활, 특히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였다. 엄마에게는 “콜라캔을 들고 와서 엄마 이거 어떻게 열어요?”하는 여덟 살 난 딸의 모습이 여전히 귀여운지 모르지만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무능력하고 매력없는 미숙아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살님이 둘째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유난히 집착하게 된 또다른 요인은 첫째 딸의 반응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인 네 살까지는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동생에게 빼앗겨버린 첫째 딸이 심한 상처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
자연히 한꺼번에 사랑과 관심을 빼앗겨버린 다섯 살 짜리 어린이는 좌절되고 분노하고 슬펐을 것이며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단 빼앗겨버린 사랑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도 이쁘지 않다.
실제로 첫째 아이가 부모에게 매달리면 “너는 다 커가지고 왜 이러냐?” “징그럽다. 저리 가거라.” “왜 새삼스럽게 애기짓을 하니…” 하는 반응들을 부모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리고 거절당한 아이는 무안하고 슬프고 분노한 감정을 쌓기 시작하고 때가 되면 그러한 감정들은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부모들은 그러는 자식이 이유야 어쨌건 일단 반항하는 자식이 덜 귀엽고 미워지게 된다. 보살님 역시 반항하는 첫째 딸보다는 애교스러운 둘째 딸이 좋았던 것이다.
사실 반항하는 자식이나 애교부리는 자식이나 심리적 특질이나 가치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식의 반항은 부모의 감각을 불쾌하게 만들고 반대로 애교는 부모의 감각을 즐겁게 만들지만 알고 보면 둘 다 부모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반항이나 애교가 모양만 다를 뿐 결국은 자신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한 똑같은 동기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귀엽고 애교스러운 자식이 마치 더 효성스러운 자식인 줄 착각한다.
반항과 애교는 둘 다 부모의 관심과 돌봄을 원하는 궁극적 목적을 가질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효도나 불효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보살님으로 하여금 두 딸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사랑의 좌절에서 오는 첫째 딸의 반항이나 자기만이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둘째딸의 애교보다는 자기 연령에 맞는 성장과 발달, 그리고 책임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보살님은 더이상 차문을 열어주고 신발이나 양말을 신겨주지 않았다. 공양시간에도 엄마가 다 차려줄 때까지 식탁에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함께 수저를 놓고 준비하고 설거지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다.
세상에서 어떤 위대하고 유능한 부모도 자식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 부모의 능력이나 돌봄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자라면서 반드시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이나 책임을 수행해야만 한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자신의 연령과 조건에 맞는 적절한 행동과 능력을 키우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가정은 아이의 성공적인 성장과 사회생활을 위해 준비하고 연습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이의 정상적인 책임능력이나 성장을 방해하는 지나친 보호나 돌봄은 어린이 학대만큼이나 해롭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