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30.다시 솟은 수미산, ‘삼예 사원’

수미산 순례기

2007-09-25     김규현

동그란 ‘만다라’형의, ‘삼예 사원(Samy e, 桑耶寺院)’

라사에서의 일상은 다시 되풀이되고 있었다. 오전은 티벳어 수업에 들어 갔다가, 오후에는 다음 인도에서의 전시회 준비 작업에 몰두하다가, 해 질녘이면 죠캉 사원의 광장으로 나가 군중 속에 섞여 코라를 한 바퀴 돌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저녁이면 의기투합하는 티벳친구들과 차를 마시면서 잡담이나 하는 것으로 하루가 저물었다. 그러다 토요일만 되면 근교의 유적지로 답사나 나가는 판에 박힌 일상생활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베이징에서 온 오랜 친구들, 라오펑여우(老朋友)들을 위하여 가이드가 되어 역사의 고향 산남(山南)지방으로 향하였다. 기추하를 따라 내려가다 취수이교(曲水橋)를 건너 콩가 비행장을 지나 한참을 달려 삼예 사원의 나루터에 내렸다. 기원의 오색깃발, 타루초를 펄럭이며 강을 건너는 큰 목선 위의 사람들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넓은 강은, 카이라스에서 ‘탐촉감밥’, 즉 ‘말의 입에서 흘러나옴(馬泉河)’으로 발원하여, 설역고원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면서, 야룽쟝포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히말라야가 끝나는 곳에서 곧장 남으로 내리 꽂히듯 흘러내려 인도 벵갈 평원에서 부라마푸트라로 다시 이름을 바꿔 갠지스의 본류와 만나 벵갈만으로 들어가는 대하이다.

그러니까 이 지점은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린, ‘신의 눈물’로 쓰여지는 대하드라마의 중간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후반부는 나와 함께 써야 하기에 더욱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강을 따라 해동의 나그네도 히말라야를 넘어 바다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니까.

배에서 내려 절에서 마중 나온 트럭을 타고 삼예 사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였다. 경내의 객사에 짐을 풀고 먼저 동쪽편의 헤포리 동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가람의 전경을 보기 위하여는 당연한 노동이었다. 이 언덕은 이 곳에 터를 잡은 파드마삼바바가 지진제(地鎭祭)를 지냈던 곳이며 또한 그를 후원한 티송데첸 왕의 겨울궁전이 있었던, 흔히 ‘타크마르의 헤포리’라고 부르는, 유서깊은 곳이었다.

이윽고 사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 서서 내려다 본 것은 그냥 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만다라’였다. 아니 수미산설에 의한 ‘수미산도(須彌山圖)’였다.”

이미 삼예를 두 번이나 와 보았지만, 평면적으로만 보았기에 그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조감하니 듣던 대로 삼예는 특이한 형국을 하고 있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가람의 경내는 완전한 원을 이루고 있었고 정확한 방위에 맞추어 담장에 4대문을 배치하였다. 그 가운데 수미산을 상징하는 3층의 오체대전(烏策大殿)이 자리 잡았고, 그를 중심으로 동서로는 일광전·월광전이, 4방으로는 4천왕과 4대주를 상징하는 4개의 색깔 다른 탑이 각기 포진하고 있는 형태였다. 한눈에도 완벽한 인공적인 ‘수미산도’였다. 우주불인 비로자나를 주불로 하는 ‘대일여래만다라(大日如來曼茶羅)’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특이한 사원은 고대인도 파라 왕조 시대, 마갈타국의 오단타푸리 사원을 모방하여 건조되었다고 한다. 한눈에도 인도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티벳 최초의 대가람

삼예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티벳 불교사상 최초의 대사원이었고, 비구와 비구니 총림이었고, 금강계단이 설치된 곳이었다.

한때 전 중앙아시아의 패자였던, 토번 왕국의 토대를 닦은 송첸감포 왕의 5대손인 티송데첸 왕은 티벳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불려지는 인물이다. 송첸감포에 의해 불교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다고는 하나 토착종교인 뵌포교와의 갈등으로 그 세력이 미미하던 시기에 그는 뵌포교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장려하기로 원력을 세웠다. 그래서 신앙의 구심점이 될 사원을 세울 자리를 물색하던 중에, 파드마삼바바의 추천으로 지금의 삼예 사원 자리를 택하게 되었다. 원래 타크마르의 헤포리 언덕은 그의 부친인 티데주첸 왕의 겨울왕궁이 있던 자리여서 모친인 당나라의 금성(金城) 공주 사이에서, 그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에다 사원을 짓게 된 것이었다.

754년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2년간의 불사 끝에 779년에 마침내 이 웅장한 삼예 사원을 준공하고는 그 기념식장에서 ‘숭불조칙(崇佛詔勅)’을 내려 조정 대신들에게 서명케 하여 그 것을 석비로 만들어 조칙과 함께 영구보존토록 하였다.

1,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석비는 삼예의 법당 옆에 서서 당시 그의 원력을 말해주고 있다.

“라사와 타크마르의 사원에 3보(三寶)의 법기(法器)를 구비하여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영원토록 그치지 않기를, 또한 용구의 보급도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노라. 앞으로 대대손손 모든 왕들은 이와 같이 서약하여야 하며 그리고 이 서약이 지켜지도록 출세간과 세간의 모든 신들께서 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라노라. 이에 왕과 대신들과 모든 사람들이 서약하는 바이다. 서약한 내용은 비석 곁에 보존되어 있다.”

티송데첸 왕을 도와 설역고원을 불국토를 만든 두 명의 인도의 승려가 있었다.

바로 인도불교의 중심지인 나란다대학의 학승인 샨타라크시타(寂護)와 파드마삼바바(蓮華生)였다. 먼저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이는 샨타였는데, 그는 국왕에게 불교의 요체를 설하였지만 주위의 반대가 심하여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국왕의 초청으로 돌아왔을 때는 파드마와 함께였다는데, 유명한 밀교사였던 그가 어떻게 주위 사람들과 토착 신장들을 굴복시키고 삼예의 건설을 진행시켰는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다만 뵌포교도와의 ‘마법의 시합’ 등의 전설은 지금도 곳곳에 무성히 남아 있다.

이들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인도승을 12명 더 초청하여 779년 삼예에 금강계단(戒壇)을 설치하여 셀낭과 상시 등을 포함한 귀족 자제 6명에게 비구계를 주어 최초의 본토인 승단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범어를 습득시켜 불경의 번역에 착수케 하고, 한편으로는 설역고원 구석구석까지 법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최초의 비구, 셀낭은 후에 중국 사천성에서 신라의 왕자, 무상(無相)이라고 전해지는 김화상을 만나 불법의 요체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돈황 문서에 의하면 티데송첸 왕은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서역에도 사람을 보내 고승을 초빙하여 불경번역에 힘썼다고 하는데, 그 결과 삼예는 전 중앙아시아의 불교의 중심이 되어 불교학의 토론장이 되기도 하였다. 샨타라크시타의 인도 제자, 카마라실라의 중관계(中觀系) 불교와 중국의 선승, 마하연(摩訶衍)과의 ‘삼예의 논쟁’은 유명한 사건으로 중국불교사에도 기록되여 있다.

이렇듯 삼예는 한때 명성을 떨쳤으나 곧 토번왕조와 그 부침을 같이하여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암흑기가 지나고 불교의 후홍기(後弘期)가 도래하였지만 삼예는 예전의 명성은 되찾지 못하고 라사의 3대 사원으로 불교학의 중심지 자리를 넘기게 되었다. ‘수미산설(須彌山說)’을 인공으로 재현한 사원, ‘펠삼예 밍규르 룬기두파’ 대사원!

다시 이 사바세계 남섬부주의 설역고원에 다시 솟은, 삼예 사원의 영광은 저녁 연기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