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을 넘어선 여인(女人)의 삶

이남덕 칼럼

2007-09-25     관리자

- 최혜숙 지음 『역사의 파도를 헤치고』를 읽고
영주(塋宙) 이남덕/이화여대 명예교수나의 오랜 친구 최혜숙 선생이 자기 일생의 회고록을 펴냈다. 그녀는 일생동안 교육계에 몸바쳐 왔고, 특히 문화사 연구에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한 교육자·역사학자의 기록이 아니라, 20세기라는 조국 수난(受難)의 역사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겪어야만 했던 그 생생한 아픔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산 증언(證言)인 것이다.
그녀는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서울로 상경,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한일합방(1910년)한 지도 30년이 된 1940년에 그녀는 일본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1940~1943. 9)에 유학했고, 귀국하자 모교인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어려서부터 일본말로 배우고 한국말 사용은 금지되었던 시절, 차츰 상급반이 되면서 ‘일본’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잔혹한 정책을 펴고 있는 국가인가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니 문자 그대로 ‘순진한’ 여학생이었고,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사법관시보인 남편과 결혼하고(1947. 5), 다음 해에는 첫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가정생활은 너무도 일찍 깨어져버렸다.
1949년 10월 어느 날 밤중, 불행은 남편의 동료인 T 검사의 출현으로 돌연한 가택수색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는 6·25전쟁(1950)의 전초기로, 사상적으로 조금만 의심이 가면 국회의원이건 법조계이건 검거하는(국회 프락치사건·법원 프락치사건) 살벌한 때였다.
남쪽 단독정부 수립 직후의 과도기에 공산주의자에 대한 사상적 탄압만을 목적으로 소수의 경찰관리나 검사들의 성적 중심의 공명심 때문에 ‘빨갱이’란 한마디로 희생된 엘리트들이 많았던 잔혹한 실정기였다.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할 시점에서 당시의 정부는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집착한 실수를 한 것이다.
남편의 혐의사실은 그가 사법관시보 시절 여가를 선용하느라 판검사 예비자들의 모임인 독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는 주로 외국어 학습도 겸하여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의 해석과 토론 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우리 사회의 실정이 오랜 봉건사회의 끝머리에 일제통치의 시달림을 계속 받으면서 살아오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남으로 하여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는 났지만, 이번에는 강대국들이 2차대전 종결로 그어놓은 38선으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맞게 되어 사회의 혼란상은 말할 수 없었고, 사상적 갈등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 외국 학자들은 당시의 조선사람들의 사상을 ‘혁명적 내셔널리즘〔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조선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라고 부르고 있다 - 모두가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애국적 심성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법관으로 살아나가려면 깊이 사회사상을 연구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데도, 당시의 이승만 정부나 미국군정청은 우리 사회에 대해서 너무나 이해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남편은 독서회 가입만으로는 증거불충분하다고 무죄의 선고를 받았으나 집요한 담당검사의 공소로 석방되지 못하고 미결로 감옥에 구금된 채 6·25동란을 맞았다.
고문당한 상처를 가지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남편을 만나 한숨 돌린 것은 잠깐이고, 북쪽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지 달포 지난 8월 6일에 서울 시내에서 남편은 실종되고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겪은 6·25동란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런 사상관계에 말썽이 없던 대학교수들조차 신분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판이라 대부분의 교수들은 인민군이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하나 다락 속에 숨어버리고, ‘교양을 위한 재교육’에 응한 교수들은 정치보위부(政治保衛部)에 들어가서 9·28 수복으로 미군이 인천상륙했을 때 일부는 북으로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던 예들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 같은 경우는 법조인 프락치사건에 걸렸었기에 ‘재교육’의 대상이 되어 정치보위부에 연금되었을 것이다.
피납치 인사들은 정치적 경향이 반북(反北)이건 친북이건 유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6·28에서 9·28까지의 3개월 동안, 이승만 정부가 전쟁 터지자마자 한강 이남으로 도망치며 한강 다리는 폭파하였으니, 이 버려진 서울에서 살아있던 사람들은 살아 있는 목숨들이 아니었다. 의사나 기술자 등 유능한 전문직 인사들이 전쟁 중이라도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또는 가족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직장에 남아 있다가 끌려간 경우, 또는 공산주의적으로 재교육한다고 수용하였다가 납치된 경우 - 이들 피납치 인사들은 9·28후퇴 때 미아리 고개를 줄줄이 묶인 채 북으로 끌려갔으니(북으로 납치 되어가는 길에서 미군 비행기 폭격을 맞기도 했다.) - 생사를 모르고 50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녀는 두 번의 조선전쟁(6·25 여름전쟁과 1·4후퇴의 겨울전쟁)을 서울에서 지낸 후 모진 시련을 이기고 다시 교단에 서게 되었으니 ‘교육’은 전쟁미망인들의(자격증이 있는 경우는) 살 길이었으나 그 길이 없는 절대다수의 유가족들이 살아나가야 할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그녀는 재기할 것을 결심한다.
30대 젊은 나이, 나만 이렇게 전쟁 속에서 혹독한 경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 때문에 네 살바기 외아들을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홀로 서리라 마음 먹는다. 그녀의 이력을 보면 51년부터 60년 사이는 조선전쟁을 사이에 두고 여학교 선생을 죽 했고, 홍익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60년에서 78년 사이에 단국대학·홍익대학(세계문화사 담당) 교수 역임, 88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대학원 강사를 했으니 일생을 교육자로 관철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국난시대를 함께 살아온 것에 대한 공감이 절실하게 와 닿는 점은 물론이고, 그 밖에 이 책의 서술이 너무나 진지하고 정확하며 저자의 성품이 또 너무나 온유하고 성실한 데 대한 감탄심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민족의 비극. 조선전쟁’에 대한 그녀의 서술을 보면 역사학자의 정확한 눈과, 자기 자신이 전쟁 와중의 희생자이면서도 중정(中正)한 불편부당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 용기에 대해서 찬탄심을 금할 수 없다.

“…동족간의 상쟁이 건국 이래의 통한사(痛恨史)가 되어 우리의 국사를 더럽히고, 더욱이 미국군과 조선군 양쪽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도리어 미국군에 매달리는 마음이 되는 우리의 현실이 슬플 뿐이다… . 이것이 만일 왕년의 일본과 같은 외국의 침입에 의한 참화라면 울분을 터트릴 상대라도 명백하다지만, 강대국간의 실랑이와 대립에 의해서 우리들 한국인이 꼭두각시 인형모양으로 싸우고 피흘리는 그 끝판에 온 살륙은….”
우리가 앞으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민족감정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8·15해방 후에서 6·25동란 전까지의 우리 사회의 사상적 갈등에 대해서 엄정한 중도입장에서 비판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 회고해 보면, 1945년 해방 후 1950년 6·25 동란까지는 해방된 자유의 즐거움보다는 칠흑 같은 암흑의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 학정에서 겨우 벗어난 모두가 다소는 무지했던 시기였다. 그랬었기에 이상적 사회주의가 다음 세대를 비출 하나의 대안쯤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가치관의 혼돈과 이지러짐을 통과한 그 때의 젊은이들 역시 결국 나래를 펼치지도 못한 채 이북 특유의 공산주의에 악용당하기도 하고 국군에게 피살당하기도 하는 등 암울한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 단지 미국과의 유대관계로 대세를 잡은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부하 고위층들간의 정치계략이 현란스럽기만 했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할 수만 있다면 일제의 경찰제도의 연장과 친일파의 정치세력의 연장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세력의 행적을 보면 48년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그리고 정권수립 후 50년 6·25동란을 맞이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이 기간에 희생되었는가. 그 당시 제대로 된 사회라면 상해 망명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했어야만 했다. 48년에 남북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된 다음 해 김구 선생은 중도적 입장에서 남북협상을 시도하려 북조선으로 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오자 49년에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승만 씨의 사주로 이루어진 참극이라고들 했다. 좌익과 우익, 남과 북의 양극론 틈에 중도의 길이 설 자리가 없었으니 민족의 비극은 정도를 잃은 정치에 원인이 있었다 하겠다.
역사는 흐른다.
20세기 백년 동안을 우리는 전반은 일제에 유린당했고 후반은 세계대전의 후유증인 동서 냉전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아직도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한 아픔 속에 살고 있다.
21세기에는 참으로 우리 민족이 20세기의 민족의 한을 풀고 자유롭고 행복한 새 역사를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한(恨)이란 한자 그대로의 뜻은 원한(怨恨)이란 의미가 강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야말로 한 많은 역사를 살아오다보니 그 원한을 넘어서는, 맺힌 ‘한’을 푸는 ‘멋’까지 터득하게 된 것이다. 판소리를 들어보라. 우리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민중의 고통을 함께 울어주고 달래주는 ‘멋’이 있지 아니한가.
이제까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아픔과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여성들이 해왔다는 것을 『역사의 파도를 헤치고』를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낀다. 〔이 책의 일본어 판이 나왔는데 제목이 『한(恨)을 넘어서(恨 の彼方に)』 〕이다.
앞으로 밝아오는 21세기.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서둘러서 일을 망치지 말고 우리 민족에 내재해 있는 좋은 성품을 착실히 다지고 발휘하면서, 참으로 행복한 장래를 열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