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 온 우주의 존재가 하나의 생명, 하나의 부처입니다.”

초대설법

2007-09-25     관리자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는 바로 우주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단지 우리 인간의 행복만을 위하는 그런 종교는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불교는 특히 어느 종파의 진리도 부처님 가르침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우리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법은 ‘그 행복이 어떠한 것이고 행복의 반대가 되는 불행의 시초는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은 의의가 없고 개인적인 복락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픈 데가 없으면 무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해서 병자가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 병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선 나와 너를 구분하는 자기라는 이기적인 관념 자체가 무명병입니다. 무지의 병입니다. 무명 때문에 탐욕심과 분노하는 진동이 많이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은 더욱 더 치성해져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무슨 법회에서나 삼보에 귀의하는데, ‘부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관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부르는 대로 따라서 합니다. 그러나 삼보라는 뜻만 확실히 알아도 우리는 범부심인 무명을 상당히 벗어나게 됩니다. 같은 불법도 초기에는 부처님 하면 모양으로 나투신〔化身〕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으로 숭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참 뜻은 이른바 대승불교의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법신 부처님이라는 사상을 모르면,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우주적 종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화신 부처님은 모양으로 나투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국한되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포섭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법신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뿐만 아니라, 다른 성자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다 법신 부처님의 개념 속에 포함됩니다. 단지 모양이나 이름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른바 명부득(名不得) 상부득(相不得)이라,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런 존재까지도 법신 부처님의 개념 가운데 다 포섭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불교가 진솔히 세계적인 우주의 종교가 되지요. 우리는 지금 국가적인 안녕을 위해서도, 국제간의 단결을 도모하지 않으면 참다운 한 국가의 안녕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기업이나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모두가 다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쪽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문화가 발전될수록 모든 현상은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냥 우주의 본질, 우주의 생명 위에서 가만히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 우주의 생명자리인 법신 부처님은 본래 다 원력이 있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자기 수양에 따라 여러 가지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의 본질인 법신 부처님도 원력이 있습니다. 목적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우리 신앙도 더 깊어지고, 또 그런 것을 알아야 아까 말한 근본적인 번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 법신 부처님,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그 부처님 자리는 이름이야 어떻게 불러도 좋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 개념이 무엇이든, 그 가운데 우주의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모두가 포함되면 좋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의 참 뜻입니다.
지금은 무서운 시대이고 세계의 위기 상황인데, 이런 때 다른 것을 배격하는 마음은 굉장히 치졸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이웃간의 화평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와 더불어 남도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뿌리나 그대 뿌리나, 동양사람 뿌리나 서양사람 뿌리나 모두 다 하나의 생명에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조금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로 이른바 유출설(流出說 : eman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대 모든 철학에서 말씀한 것이고, 힌두교나 다른 세계적인 종교도 대체로 그와 유사한 말씀을 했습니다. 흐를 류(流)자 날 출(出)자 유출인데, 그 뜻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생명이 우주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위 틈새에서 물이 솟아 흘러 나오듯이, 우주의 본래 생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부터 모든 종교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어느 위대한 철인도 유출설을 부인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가령 불교의 우주관은 맨 처음도 끝도 없이 항시 영겁으로 순환합니다. 모두가 다 파괴되고 텅텅 비어서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즉 공겁(空劫)이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형상만 없는 것이지 생명은 그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생명의 작용으로 해서 다시 우주가 차근차근 형성되어 나옵니다. 이게 아까 말한 유출(流出)입니다. 샘물 솟듯이 태양계가 나오고 금성, 토성, 지구가 나옵니다. 어떠한 존재나 근본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종말에는 다시 모두 진리로 돌아갑니다.
종교는 우주의 근본 진리와 항시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기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기본 철학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 모든 정보, 종교, 학문 체계가 얽히고 설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진리를 소중히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번뇌를 녹여서 마음의 병자가 안 되기 위해서라도 꼭 진리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이고 근본적으로 번뇌를 없애지, 그렇지 않고 고식적으로 우선 눈 앞에 보이는 것, 예컨대 우리집이 재수가 나쁘니까, 내 몸이 아프니까 좀 고쳐 봐야겠다는 식으로 좁은 마음을 써서는 자기가 봐둔 것도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번뇌의 본질적인 무명이 제거되겠습니까?
모든 갈등이 무명 무지에서 오는데, 무지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다른 것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냥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합니다.
우리 본래의 생명이 바로 이 법신 부처님한테서 왔습니다. 법신 부처님은 이름도 모양도 없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똑같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함으로 해서 내 마음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성품이나 우주의 본래의 생명자리인 법신 부처님이나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바로 참다운 부처입니다. 부처님 신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지금 새삼스럽게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라는 소식입니다.
단편적으로만 불교를 공부해서는 우리 목전에 있는 문제도 본질적인 해결은 절대로 못합니다. 가정이나 사회문제나 항시 모든 문제를 진리의 차원에서, 우주의 본 바탕에서 비추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시원스럽게 해결이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눈 한 줌을 뜨거운 화로에다 넣으면 금방 녹아버리듯, 어느 모습이나 고민이나 진리에서 보면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진리에서 보면 죽고 살고, 잘 되고 못 되고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서 보면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음이 없습니다.
불생불멸이라, 우리 생명 자체는 본래 나지도 죽지도 않고 영생(永生)으로 존재합니다. 내 생명이 몇십 년 살다가 죽겠지. 내 몸이 지금 안 좋으니까, 몇 년 안 가서 죽겠지. 이러면 항시 불안스럽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본래로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용기가 나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우주의 목적의식은 근본 본(本)자 원할 원(願)자 본원이라, 또는 근본 서원 그럽니다. 원래 우주는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는 자칫 산이나 냇물이나 산 위에 있는 절이나 이런 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 정도의 업장을 가진 중생들이 가진 견해이지 진리의 견해가 못 됩니다.
진리는 우리 인간적인 견해, 탐욕심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이런 독스러운 마음이 가셔버린 성자의 경지에서만 참다운 진리가 보입니다. 이것을 견성오도(見性悟道)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견성’은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로 우주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뜻이고, ‘오도’는 깨달을 오(悟)자 길 도(道)자인데 도(道)는 바로 진리를 말하므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불교 말로 참된 사람, 진인(眞人)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고 했는데, 무위진인은 모양이나 이름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에 걸리고 무슨 감투에 걸리고 재산에 걸리면 참다운 진인이 못 됩니다.
불교의 목적은 무위진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금생에 재산 많이 모으고 감투가 올라가는 것으로 인간의 목적을 생각하면 정말로 안타까운 속물입니다. 소중한 자기 생명을 갖고서 속물에 바쳐서 일생을 마치면 되겠습니까? 불자님들, 목전에 가족들 문제라든가 여러가지 문제가 얽히고 설켜서 먹고 살기도 어렵고 정말로 고난에 처해있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문제까지도 근본적인 해결은 꼭 진리와 더불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이 빨라지고, 또 어느 고민에도 우리 마음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유출설은 철학자로 플라톤이 맨 처음에 제창했습니다. 물론 더 앞선 분들이 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 체계를 세운 것은 플라톤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에서 왔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두가 그 역으로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테오리아(theoria)라는 말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또 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우주는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고 궂다고 생각하고, 남을 좋아도 하고 미워도 하고 욕심도 내고 하지만, 그런 것도 인간이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런 모든 시행착오를 거쳐서 드디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성현들이 철인들이 다 한결같이 하신 말씀을 저는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에서 왔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생명으로 귀로(歸路)합니다. 즉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내 자식이나 모두가 다 실은 빠르고 더디고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다 근본 고향자리, 진리로 돌아갑니다. 진리에서 왔으니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 귀중한 불자님들이 많이 모이셨습니다. 이런 자리를 그냥 그런저런 미봉책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좀 납득되기가 어려우셔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질적인 진리에다 비추어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십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빨리 근본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이지만, 우리 마음은 지금 여러 가지 못된 생각도 하고, 또 금생에 태어나서 진리에 맞는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리가 뭣인지 모르고 생활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진리 그대로인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시간성이나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해서 더럽혀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형체 없이 그림자같이 좀 머물다가 나중에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 우리의 그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