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되어

함께 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09-25     관리자

“몸은 보리수(菩提樹)와 같고,
마음은 거울틀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며 티끌 끼지 않도록 하세.”
- 신수 대사의 게송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끼일까.”
- 육조 혜능 대사의 게송

군자란이 몇 년 만에 꽃봉오리를 맺었다. 꽃대를 발견하고서는 관심을 쏟아 좋은 자리로 옮기고 잎에 쌓인 먼지도 닦아주며, 윤이 나게 대접하게 되었다. 화분을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다가, 이렇게 차별심이 일어나서야…
때끼고 어두운 세상살이 더불어 함께사는 세상으로 어떻게 닦고 밝혀야 할지.
물질생활은 끊임없이 차별상을 만들며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싫증나지 않게 마음에 만족과 행복을 채우기 위해 쓰고 또 쓴다.
아귀다툼 같은 경쟁과 혼돈 속에서 짓밟히지 않고 누리는 자로 우뚝 서 보자고 하루하루 돌아간다, 불꽃을 튀기듯이.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불을 뿜었다. 언제나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폭력, 잔혹, 죽음을 꾸며덮었다.
자연에 대한 파괴와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끼리도 전쟁놀이를 하고, 쓰레기 전쟁, 교통 전쟁, 범죄와의 전쟁 등을 비롯해 사회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 민주화 운동도 싸움 속에 있었다.
정의와 좋은 뜻의 경쟁을 가려 말하지 않고 싸잡아 보았지만, 이렇듯 끝없는 투쟁 속에 용케 살아남아 새 세기를 맞았다.
이 어떤 장엄한 의식으로 이 새출발을 감격스럽게 받들어도,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모두가 혼돈이고 고통이다. 거기에 물듦도 도피도 아닌, 진정한 삶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고물장수 아저씨가 손수레에 매단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대중가요 가락에 맞춰, 하루벌이 하는 고단한 삶을 녹이며 지나갔다.
모두들 2000년은 최첨단 과학문명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비전과 새 삶을 얻고자 야단인데, 이런 장광설보다 서민들이 생명 부지코자 애면글면 살아가면서, 노랫가락에라도 스스로 위로하는 모습이 오히려 희망 넘쳐 보이지 않은가.

우리 역사는 불행히도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도 배신해 왔다. 최근 99 민중대회에서 뼈빠지게 농사지어도 빚더미에 앉은 농부들 여럿이 울분을 못 참고 몽둥이를 휘둘러 구속되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으로 삼던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들이 고역을 도맡기는 내내 한가지이다. 오늘에 와서 농산물까지 세계 시장에 의해, 특히 미국의 몇몇 거대 곡물상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니, 그저 땅만 믿고 살아온 농사꾼은 억울할 뿐이다.
게다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첨단 과학화다 유전공학이다 하며 아예 씨(종자)를 다르게 만들어 가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처럼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지식인’이 되어야만 살 길이 열린다고 야단인 것 같은데, 서민들은 ‘신무식자’가 되고 자꾸 소외되어 빈곤 계층으로 떨어져 가는지…
천 년을 여는 새해가 밝았다고 달라진 게 아니라, 단지 어제의 것이 한 바퀴 돈 것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 우리 업보는 우리가 풀지 않으면 그대로 지고 갈 수밖에 없다. 한 바퀴 구르면서 거꾸로 된 세상을 보고, 그것을 뒤집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부지런히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육신의 고통값도 제대로 못 받는데, 세계를 주름잡는 금융자본은 작은 나라 경제쯤은 통째로 흔들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세계를 상대하지 않으면 나라 살림이 안 되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틀에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분단국이라는 고통까지 안고 사는 형편이다. 이 말은 우리 사회가 양극화하여 생긴 차별 위에, 민족 내부의 남북 차별과 세계화한 빈부 차별의 고통까지 더함을 뜻한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능력에 따라 얻는 결과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공평하지 못한 모순의 굴레에 이중 삼중으로 억눌려 있다. 차별이 있으면 사소한 일에서도 섭섭한 법이다. 차별과 차등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틀 속에서 이 고통을 두고 행복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은 인간 삶의 차별상을 큰 문제로 본 것이었다. 생로병사가 한결같고 공평하다면 무슨 문제인가. 호사스럽고 비참하고, 귀하고 천하고….
이렇게 벌어지는 인간의 고통은 끝이 없다. 누구는 태어 나는데 누구는 죽어야 하는 생사 차별의 고통 문제까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불교는 슬픔을 환희로, 절망을 희망으로, 고통을 해탈로, 죽음을 살림(생명)으로 돌려놓는 힘을 얻는다.
끝없는 투쟁과 차별 속에 놓인 삶 가운데 ‘인간답게’ 살 길을 이미 열어 보였지만, 우리 모습은 어떤가. 절이나 교회나 집은 번창한데, 무명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병들고 썩는 것을 막는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은 어디로 갔는지.
오늘날 종교는 대부분 신자 손에서는 짜투리 생활에 속한 하나의 취미일 따름이고, 성직자 손에서는 시장바닥에 선 상권과 다름없다. 생활을 강조하면 때묻은 세속의 모습을 벗어나기 어렵고, 종교를 전부로 삼으면 우상을 만들기 십상이니 진정한 종교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 세속도 초월도 아닌 삶 속에 진리는 없는지.
우리 사회에서 그 한 길을, 더불어 함께사는 세상을 불교시민운동으로 닦아가고 있는데, 여기에 현대 불교의 새 희망을 건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불교 현실을 돌아보건대, 불교방송도 만들고 인터넷으로 정보망을 건설해 가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찾고 있지만, 대부분 교육의 내용과 과정은 낡은 그대로 있고 세상에서 실사구시하는 부처님으로서 세간해(世間解)나 대기설법의 방편은 좀처럼 찾기 힘든 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고통의 문제가 자꾸 불거지는데,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해탈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제로 구제가 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시대의 방편으로 쓰지 않고 박제로 만든 불교, 이것을 벗어나고자 불교운동이 필요했다.
이 운동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나온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불교운동은 작은 일로 세상을 구한다. 아니, 스스로 기쁨을 얻고, 함께 하기에 모두 어울려 부족함이 없게 한다. 노력으로, 돈으로, 지식으로, 마음으로 자원 활동에 참여하는 작은 손, 한마음이 있는 그대로 모여 천수천안이며 보살이다.
대중이 함께 기뻐하는 ‘수희공덕’이 불국정토를 이룬다. 다시 보면, 태산이 ‘티끌 모임’이니 세상은 본래 빈 것, 욕심낼 마음이 없다. 색즉시공이다. 몸이나 물건이나, 세포나 분자의 모임 곧 ‘티끌 모임’으로 모습을 이뤘으니, 공즉시색이다.
집안 살림도 때나 먼지를 털고 닦아 윤을 낸다. 맑고 밝아 기쁨으로 가득찬 청정국토나 몸이나 그 본색은 이미 빈 것이다. 이 위에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니 텅 비어 한마음이고, 아무 차별심 없이 기꺼이 하나되어 기뻐할 수 있다.
수희공덕은 몸과 마음의 때를 벗고 대중이 개성을 살리면서 화합하여 정토를 이루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이때 우리 불교운동은 힘을 발휘하여 분열과 투쟁을 화합과 평화로, 슬픔을 환희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세상의 고통을 해방하는 생명의 길을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