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보살행 깨달음의 완성

특집/불교의 복지관

2007-09-25     관리자

보살행이란 깨달음의 완성이다. 보살행이라는 실천적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견성이나 해탈 성도(成道)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불교, 특히 선종은 ‘열반에도 머물지 말 것(不住涅槃)’과 ‘공에 떨어지지 말 것(不落空)’을 거듭 강조한다.
자기 한 몸의 해탈에 안주하며 도인 연(然)하는 소승의 개인 구원은 북방 대승불교가 지향해 온 보살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보살은 모든 중생의 병이 낫지 않는 한 자신의 병도 낫지 않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회구원에 설 때만이 그 존재 의의를 갖는다.
대사(大士)로도 번역되는 보살은 불도 수행자를 총칭하는 말인데 흔히 부처의 경지에 가까운 법력을 지닌 수행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보살은 사홍서원을 세워 6바라밀을 수행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자리이타행을 닦고 51위의 수행 과정을 지나 불과(佛果)를 얻는다.
이는 흔히 보는 불교사전이나 불교 교과서의 보살에 대한 설명이다.
이 같은 ‘보살’의 풀이는 하화중생이라는 사회제도(社會濟度)를 불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김으로써 진정한 보살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보살의 중생제도는 결코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일 수는 없다. 보살이 다짐하는 사홍서원의 첫째 목표가 중생구원〔衆生無邊誓願度〕이다. 다시 말해 모든 보살행의 회향점은 중생구원이다. 불과는 견성이라는 자리(自利)가 중생제도라는 사회 구원에 이어지지 않으면 그 열매를 끝내 얻지 못하는 도중하차가 되고 미완성의 그림이 되고 만다.
부처·조사(祖師)·보살 등으로 구체화된 불교의 이상적 인격체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도덕적인 지성인을 말한다. 좀더 거창한 종교적 신비감을 불어 넣는다면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정의를 한 몸에 갖춘 인격자다. 과연 이 같은 인격자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소임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중생을 제도해 불국정토를 건설하는 세상 구원이다. 보살이 닦는 6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도 사회구원의 중요 내용인 보시를 우선 순위에 올려 놓고 있다.
제도의 대상은 언제나 가난하고 굶주린 중생,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 부당하게 억눌린 자다. 가난 제도의 가장 직접적인 행위는 물질적 보시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중생의 제도에는 물질적 구원뿐만 아니라 정신적 구원도 필요하다.
보살행과 관련해 한 가지 꼭 강조해두어야 할 점은 현실구원이다. 불법이니, 불성이니, 불도니, 자성이니 하는 말도 더 구체화시키면 ‘생명’이다. 우리의 육체적 생명 역시 정신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 단순한 빨간 고깃덩이가 아니다.
따라서 현세의 생명은 중생제도의 분명한 우선적 대상이다. 선불교는 결코 내세구원이나 영혼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펄펄 뛰고 있는 활발발(活潑潑)한 생명을 불도 그 자체로 수용한다.
그래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중생의 생명은 무한한 가치를 갖는 구원의 우선적 대상이 된다.
고통받는 중생의 생명을 제도하지 못하는 선정은 죽은 선〔死禪〕이다.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고 헐벗은 이들을 찾아가 자신의 옷을 나누어 입는 행동하는 불심, 활선(活禪)의 선정이 바로 보살행이다.
보살행의 전형은 소다. 옛 선림의 조사스님들은 농가의 농우(農牛)를 보살도의 전형으로 상징화시켜 깨달았으면 소가 되라고 가르쳤다.
중국 조사선 시대의 남전보원 선사(748∼834)는 자신의 선지(禪旨)를 남방에서 농우로 이용하는 수고우(水姑牛)를 거듭 예시해 설파했고, “동물이 되라.〔異類中行〕”고 했다.
어느 날 남전 스님에게 제자 조주종심이 물었다.
“유(有)를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남전은 조주가 가야 할 길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아랫마을 농가의 한 마리 소가 되어라.”
남전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절대 평등한 경계에 들어가 있는 조주에게 저 세속 현실 속으로 달려가 보살행을 펼치라고 내몬다. 조주의 견성과 해탈이 지향해 가야 할 길은 이처럼 분명하다.
“소가 되라.”는 남전의 가르침은 첫째 중노릇 하느라고 마을 사람들한테 밥 얻어 먹고 옷 얻어 입었으니 이제 1차 목표인 견성이라는 개인제도(個人濟度)를 달성했으면 다음 목표인 보살도를 행하라는 얘기다. 이른바 달마 이래로 선불교가 거듭 강조해 온 환채사상(還債思想)이다.
둘째는 소가 보여주는 보살도의 핵심인 무공덕행(無功德行)이다. 소는 농부를 위해 죽도록 일을 해 주지만 결코 품삯을 요구하거나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또 죽어서는 자신의 살점까지 무주상(無住相) 보시한다. 소고기를 돈을 주고 받으며 사고 파는 것은 인간이지 소가 자신의 고기값을 가져가는 일은 없다.
진정한 보시는 이처럼 어떤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공덕행’일 때만이 불교가 지향하는 무공덕의 공덕이 된다. 소의 무공덕행은 참으로 인간이, 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상(相)을 떠난 진정한 공덕이 아닐 수 없다.
셋째는 도(道)와의 합일을 통한 깨침의 실천적 행동화다. 도는 소에게도 있고 심지어는 오줌·똥 같은 오물에도 존재한다는 게 선가(禪家)의 진리관이다.
따라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면 소와 하나가 되는 것도 우주와의 합일이며, 도와의 일체다.
동아시아 선불교 5가 7종의 한 종문(宗門)인 조동종 개산조인 동산양개 선사(807∼860)는 ‘3로(三路)’라는 법식을 만들어 제자들을 지도했다. 이른바 ‘동산 3로’라는 것이다. 동산의 3로에서도 마지막 관문이 보살행이다.
첫째는 조도(鳥道:새가 창공을 지날 때 자국이 없는 것처럼 종적을 남기지 않는 경계), 두 번째 길은 현로(玄路:유무·미오의 견해를 다 버린 경계)다.
이 두 길을 지나 세 번째 길인 전수(展手)까지를 주파해야 깨달음은 완성된다. ‘전수’란 향상일로(向上一路)에서 백척간두 진일보해서 속계로 뛰어 들어 중생을 제도하는 경계를 말한다.
지옥의 펄펄 끓는 기름 솥에서 튀어나오는 뜨거운 기름 세례를 받으며 지옥 중생, 곧 세속 중생을 구원하는 불자가 보살이고, 해탈의 경지에서 생생한 ‘말씀의 실천’을 행하고 있는 보살이다.
우리는 평생을 수행해도 자신조차 제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견성한 만큼에서, 불법을 이해한 만큼의 수준에서 이웃과 사회를 향한 헌신과 봉사를 실천할 수는 있지 않은가. 불법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불자들이여! 저 신기루 같은 성불과 견성의 잠꼬대를 멈추고 평범한 우리 주변의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돈을 나누는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
보살행이란 곧 불성의 육화(肉化)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조사선의 실질적 개창자인 마조도일 대사(709∼788)는 한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의 완성인 불성의 육화를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어느 날 한 학인이 마조를 찾아와 물었다.
“화상께서는 왜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卽心卽佛〕’라고 설하십니까?”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이 두 종류의 사람 이외의 사람이 나타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한 물건도 아니다.〔不是物〕”
“갑자기 깨달은 사람이 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대도를 실천하라.〔會大道〕”
마조 대사는 위 선문답에서 불도를 실천하는 보살행이 깨달음의 완성임을 명쾌하게 갈파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끝내 성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뼈 마디마디를 지옥에서 불태워라. 6바라밀이란 이 무슨 똥 막대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