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동이 부처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선지식 탐방/전국비구니회 회장 광우 스님

2007-09-25     관리자

사방을 둘러봐도 집들뿐이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277-12호, 나지막한 집들 속에서 우뚝 정각사 대웅전과 곧게 자란 수목이 빛을 발한다. 대웅전을 이정표 삼아 골목길을 돌고 돌아 작은 계단을 오르니 일주문 대신 현판이 참배객을 맞는다. 정각사(正覺寺), 그 절이름처럼 전국 비구니회의 수장이신 광우 스님께서 40여 년 전부터 '바로 믿고 바로 행하여 참사람 되자'는 신행불교운동의 산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니 도량의 낙엽 한 잎도 반갑다.
"선(禪師)도 아니고 강사(講師)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내게 무슨 말을 들을 게 있겠나, 차나 한잔 들고 가라"는 광우 스님께 거듭 간청하다 경상 위의 법화경과의 인연 이야기로 간신히 실마리를 풀었다.

스님, 여러 차례 법화산림을 주관하셨고, 법화경을 번역하시어 책을 엮으시는 등 법화경과 인연이 많으시지요?
"처음으로 만난 경이 법화경이고 지금도 법화경과 함께하고 있으니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지요. 또한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법을 설하시고 마지막에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 지금까지 설한 것은 다 방편이라 하시면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설해 놓으셨고, 그 것은 곧 우리 모두의 공통된 목적이기에 평생 동안 법화경을 의지해 왔지요.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주고 부처님의 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부처님의 지혜의 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시면서 일체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셨습니다.
이렇듯 대승경전 중의 꽃이요, 경 중의 으뜸인 법화경을 초발심자경문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모두가 인연의 소치이겠지요. 상주 남장사 혜봉 큰스님께서 법화경해제를 하루 만에 다 외우라고 하셨을 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어쨌든 다 외워서 기쁘기도 하고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뒤 강원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 소림사에 갔는데 금광 노스님께서 '나는 여기에서 10년 동안 화엄경 산림을 했다. 네가 이어서 10년 동안 법화경 산림을 하라'고 하셔서 꼬박 10년 동안 법화경 산림을 하고, 정각사에서도 법화산림을 여러 차례 주관하다 보니 신도들과 함께 독송할 수 있는 법화경 간행불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옛어른들의 번역이 좋기는 하나 고어투여서 현대인이 쉽게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법화경을 완역했고, 학자도 아니면서 법화경 완역본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법화경 독송 공덕이 매우 크다고 들었습니다.
"크고 말고요. 법화경 속에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법화경의 참뜻을 생각하며 지성으로 독송하면 깨달을 수 있지요. 교(敎)를 선(禪)으로 가는 노정기라 하는데 노정기를 따라가다보면 도달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마음을 밝히느냐 방법이 다른 것이지 알고보면 참선수행, 경전 독송, 염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다 통하는 것입니다.
조선 말 함월 큰스님은 화엄경을 보시다가 깨달음을 이루셨고, 제 법사스님이신 금광 스님께서는 열반경을 설하시는 중에 방광을 하셔서 불이 난 줄 알고 소방차가 달려올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얼마나 치열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그 방법에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스님께서는 스승복이 매우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세의 선지식으로 유명하신 혜봉 큰스님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으시지요?
"복이 많지요. 은사이신 성문(性文) 스님은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본사주지를 지내신 분이고, 또 수행에도 철저하셨습니다. 또 남들은 다 속퇴하는 지름길이라고 대학가는 것에 대해 걱정들을 하시는데 스님께서는 현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현대학문을 해야 한다시며 적극 밀어주셨지요.
혜봉 큰스님에겐 평생 동안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14세 되던 해 상주 남장사에 갔는데, 사미승의 염불소리만 듣고도 염불을 다 외운 것을 보면 숙세의 인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미타경 속의 극락세계가 마음을 사로잡아서 혜봉 큰스님께 '어떻게 하면 이곳에 갈 수 있느냐?'고 여쭙자, '스님이 되어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된다'는 말씀을 듣고 출가할 생각을 했지요.
또한 절에서 스님들이 참선하시는 것을 보고, 혜봉 큰스님께 '왜 저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계신지요?' 하고 말씀드리자 '광우야'하고 부르셔서 '네'하고 대답했지요. '대답하는 그놈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데 말문이 막히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대답하는 이놈이 무엇인가?'라고 하시는 큰스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스님들 참선하시는 맨 끝자리에 앉아서 하루종일 골똘하게 생각했지요. 그렇게 참선하면서 출가할 생각을 굳혔습니다."

출가하시기 전부터 경전공부는 물론이고 참선수행도 열심이셔서 큰스님들께서 대근기라고 칭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대근기가 따로 있나요. 우리 모두가 다 대근기에요. 한생각 돌이키면 견성할 수 있는데, 그 한생각을 돌이키지 않고 부질없는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열다섯 살 때 처음 절에 가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앉아 있을 때 공부가 제일 잘 됐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입승스님께서 수수께끼 같은 것을 자주 물으시곤 하셨는데, 대답을 곧잘한 모양입니다.
하루는 콩을 고르는데 입승스님께서 콩을 튕기면서 '무엇이 굴러가느냐?'고 물으셔서 '스님의 마음이 굴러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지요. 그날 입승스님이 혜봉 큰스님께 '광우가 참선할 근기입니다.'는 말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강원에서도 경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가행정진을 하곤 했는데 공부가 아주 잘 되었지요. 요즘은 비구니회관 짓는 등 일이 많으니 망상도 따라서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습니다.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0년대에는 비구니스님이 대학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리셨는지 궁금합니다.
"해방 직후 선산 문수사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혜봉 큰스님께 『선문촬요』 등의 선서(禪書)를 배우는 중에 틈틈이 참선을 했지요. 선문촬요의 내용이 하도 좋아 다 필사를 해서 밤을 새워 읽던 일이 기억에 남고, 그 마을이 서당도 있는 번듯한 반촌이었는데 서당에 다니는 청년들이 암자에 자주 놀러 와서 그들에게 초발심자경문과 불교대의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들이 혜봉 큰스님께 계를 받고 다 불자가 되었고, 매우 유교적이었던 마을분들이 일년 만에 모두 다 불교신자가 되어 한가족처럼 잘 지냈습니다. 그때부터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눈떴다고 할 수 있지요.
그로부터 몇 년 후 6·25사변이 나서 우리 암자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거쳐갔습니다. 그때 학자와 고급공무원을 위시해서 수많은 분들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면서 현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불교라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대적인 불교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갈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 졸업 후 58년도에 정각사를 창건하시고 곧바로 일요법회와 어린이법회, 학생법회, 청년법회(일반법회)를 개설하시어 직접 이끄시고, 61년도에는 「신행불교(최초의 사찰 포교지, 처음에는 월간지로 나왔는데 불교 잡지와 신문 등 문서포교지가 많이 등장한 90년대 중반부터 계간지로 나오고 있다)」를 창간해서 문서포교에 힘쓰시고, 장학회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심포교의 선각자이신데, 모두들 도심포교에 소극적일 때인데 그렇듯 큰 포교원력을 세우시기까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듯합니다.
"선각자라고 할 수도 없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던 터라 전국적으로 불교계가 뒤숭숭하기도 했고, 함께 수학하던 학생들로부터 '기독교는 쉽게 접할 수 있는데 불교는 접하기 힘든 게 유감'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도심에 사찰을 짓고 법회를 열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혜봉 큰스님의 법상좌이신 김동화 박사님께서 정각사 창건에도 많은 조언을 주셨고, 일요법회에서 법문과 특강을 해주시는 등 그 어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동화 박사님이 경전강의를 하실 때 대학생, 일반인은 물론이고 삼선교회의 목사와 통일교회 총무 등 타종교인들도 많이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 모두들 참으로 열성적이었지요. 한편 어린이 법회를 꾸려나가는데 찬불가가 없어서 석문의범에 나오는 내용을 일반동요곡에 맞추어 부르게 했어요. 아이들이 동네 언덕에 모여 부처님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운문사 강원 원장과 목동청소년회관 관장을 역임하셨고, 전국비구니회를 이끌어가시는 등 일생 동안 포교하시면서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진력하셨는데 후학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으실 듯합니다.
"학인스님들이 찾아와서 진로를 물을 때 '불교는 실천의 종교이다. 전법교화의 보살행에 진력하기 바란다.'는 말을 해주면서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실 때 유독 비구니에게만 '너는 대법사(大法師)가 되어 많은 중생을 교화한 연후에 성불(成佛)하리라'고 하신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데 비구니스님들이 여건이 좋다고 생각하시고 전법의 대소임을 맡기셨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특히 다가오는 미래사회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심성과 자비행이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그간의 농업사회, 산업사회가 남성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였고, 그에 따라 남성우위의 사회였던 것에 비한다면 정보화와 문화의 세기라는 미래사회는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증대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섬세함과 창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입니다.
그렇듯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인 만큼 여성들을 계도하는 데 장점을 가진 비구니스님들의 역할이 참으로 크다고 봅니다. 한편 여성불자들은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는데 그 또한 의식있는 비구니스님들이 앞장서서 지도해나가면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이제 비구니스님들의 역량을 결집하는 구심점이 될 전국비구니회관이 건립되면 저마다 자질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중생교화의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재교육 도량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터이니 모두가 수행과 교육과 포교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님,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고 술렁이는 분위기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말씀 더 부탁드립니다.
"항상 오늘입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할 때 흔들리지도 않고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부처님과의 이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항상 감사하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각자(覺者)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치신 분 아닙니까? 깨어산다는 것은 깨치신 분의 말씀을 따라 늘 자기를 성찰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기 마련인데 거기에 따라 흔들리지 말고 늘 살펴 보십시오. 괴로울 때는 이 고통이 어디에서 왔나를 생각하고, 내 행동이 부처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듯 경계에 부딪치면 나도 휩쓸리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곧 이 마음이 어디서 왔나를 생각하고,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비추어 봅니다. 또한 부처님의 위없이 높고 높은 법을 불자들에게 전할 때 늘 마음 한 구석에 '너는?', '너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나?'하면서 나를 되돌아 봅니다.
그래서 항상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드리기는 해도 저 역시 다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함께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정진해나갑시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우리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그 말씀을 믿고 힘껏 정진해나가자는 것뿐입니다. 또 한마디 사족을 달자면,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대로 남을 나처럼 생각하고 더불어 함께 서로 갈등없이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그대로 지상정토가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