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순례기] 26.전설 속의 불국토,"구게왕국1"

수미산 순례기

2007-09-25     김규현

환상같이 아름다운, '달의성(城) 계곡'

해동의 나그네를 유혹하는 흰구름을 따라 행장을 추스려 원반을 타고 날아 다녔다던 마법사들의 나라, 샹슝 왕국을 뒤로 하고 서쪽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난다. 설산 아래 펼쳐진 광야에는 대지의 실핏줄 같은 시내들이 수없이 길을 가로 막고 있었는데 오전에는 메마르던 것이 오후만 되면 물이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국도를 벗어나 좌회전하니 이번에는 높은 고개가 앞을 가로막는다. 악명 높은 아이라(Ayi-la, 5,610m) 고개이다.

구절양장 같은, 차가 마주오면 비켜설 수도 없는 위험한 길을 힘겹게 올라서니 광활한 고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히말라야의 설봉들이 저녁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다시 한참을 달려서 계곡쪽으로 내려가니 마치 십만군중이 도열해 있는 것 같은 바위 형상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흰 뱀 같은 상--상천하(象泉河), 즉 스투레지 강(Sutlej)이 언뜻 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아! 드디어 온 것이다.

'다와쫑'-- 달이 뜨면 환상의 성(城)이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의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과 라마 고빈다의 『구루의 땅』-을 통하여 이미 해동의 나그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곳이기에 이곳에 도착한 감회는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든 자료 속에서 이곳, '달의 성 계곡'은 히말라야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속의 이상향(理想鄕), '샹그리라'로 묘사되어 신비스럽게 채색되어 있었고, 더구나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근래에 바로 전설 속의 구게 왕국의 유지(遺址)가 실제로 이 계곡에서 발굴된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 계곡은 내 뇌리 속에는 낡은 사진 몇 장에 오버랩되어 환상적인 실상으로 오랫동안 자리잡아 온 터여서 수 차례 티벳 땅을 밟을 때마다 이곳 행을 시도해 보았지만 너무나 멀고 험한 곳이어서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기에 오늘의 느낌은 극도의 흥분상태에 가까웠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소문대로 다와쫑은 환상적이었다. 마치 십만 불보살이 해동의 나그네를 미소로써 반기는 듯, 백만 대군이 부동자세로 서있는 듯 하였다. 낮에도 이러할지언정 달이 뜨면 어떨까? 아마도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에 가슴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이 치밀어 오를 것이리라. 어느 여행가의 말--"미국에 그랜드캐넌이 있다면 티벳에는 다와쫑이 있다"를 덧붙이면 사족이 될까!

폐허 속의 '구게왕국'

나뿐만이 아니라 일행인 수미산 순례단원 모두는 땅거미가 길게 드리운 저녁나절에 도착한, 스투레지 강 상류의 마을, 쟈다(Zhada)에서 또 한번 눈을 크게 뜰 일을 만났다. 그곳은 바로 오아시스 마을이어서 푸른 숲이 가득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나무를 보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겠냐마는 보름간이나 나무 한 포기 없는 광야를 헤맨 우리들에게 푸른 숲은 그야말로 생명 그 자체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범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 정신상태에다 푸르름이 주는 안정감과 모처럼의 풍성한 중국요리로 배를 채운 포만감이 가득한 가운데 그날 밤은 따듯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환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다. 내일이면 만날 신비의 왕국을 꿈꾸면서.

티벳고원에 흩어져 살던 티벳인들이 이룩한 대제국, 토번왕조(吐蕃)가 불교와 토착종교인 뵌교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인하여 분열되자 마지막 왕, 랑다르마의 손자인 니마쿤은 몇 명의 신하와 백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서부로 들어가 카이라스 산과 마나스 호수 가의 포랑 근처에 정착하여 현지 호족인의 여자와 결혼하여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의 셋째 아들, 데춘콘(Detsungon)은 장성하자 독립하여 이곳 스투레지 강 가에 도읍을 정하고 농목을 장려하고 선정을 펴 인근 티벳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조그만 왕국이 형성되었다.

『티벳왕신기(王臣記)』라는 역사책에는 이 때를 10세기로 잡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구게왕국(古格王國,Guge)의 역사는 16국왕을 거치면서 600년간 계속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홀연히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져 버렸다가 근세에 이르러 그 궁궐터와 사원이 발굴되면서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럽 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사원 벽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벽화였는데, 그것들은 이미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 본토에서 사라진 불교, 특히 탄트라불교 즉 밀교(密敎)의 진수가 고스란히 보존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앙 티베트, 중국 본토, 중앙아시아 및 한국, 일본의 그것과는 또다른 분위기의 밀교벽화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인도의 후기 탄트라가 기존의 불교전파로인 실크로드쪽에서 밀려 들어오던 모슬렘의 침공으로부터의 탈출구로서 찾아낸 비상구 즉 옛적에는 사용치 않았던 히말라야를 직접 넘는 새로운 루트를 통해 가장 가까운 이웃, 즉 구게왕국으로 전파된 것을 의미하였다. 수 세기 동안 어둠의 동굴 속에서 드러난 생생한 벽화나 조소들은 인도 후기 밀교의 전통을 가장 근접하게 간직해 온 무척 귀중한 것들이기에 학계의 흥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사적 의미 이외에도 구게 왕국의 최후의 날 또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었다. 아직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이 문제는 천재지변설과 외적 침입설로 나눠지는데 금은 보화를 탐낸 모슬렘의 침공으로 최후까지 성 위에서 농성하다가 전원 전사한 것이라는 설이 민간에서는 무게가 실리고 있다. 늦은 아침을 마치고 20km 떨어진 차파랑(Tsaparang)의 구게 왕국 터로 이동한 우리들은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은 하늘 아래 솟아 있는 고대왕국의 페허 아래에 서서 벅찬 가슴을 누르며 천년의 시간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수세기의 망각과 1966년에 있었던 문화혁명의 상처로 인해 외형적으로는 거의 폐허 상태였지만 다행히 살아 남은 몇 채의 건물 홍묘(紅廟), 백묘(白廟) 궁전 등 - 그리고 그 안의 벽화들과 탑 등은 근래에 복구되어 그런 대로 면목은 유지하고 있었다.

입구의 섭정건물을 경유하여 백궁으로 다시 홍궁으로 들어가니 거기 어둠속에 찬란한 밀교문화의 정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하던 것 보다도 더욱 거대하고 찬란하고 이국적 모습이었다. 중국의 중요한 석굴과 불교벽화들을 거의 모두 다 섭렵한 해동의 나그네의 눈에 들어온 그것들은 한마디로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다행히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부의 벽화들이 이러할 진대 전성기 때의 것들은 두 말 해서 무엇하리오. 세계 역사상의 모든 봉건왕조가 그러하듯이 구게 왕조도 제2대 왕, 코레(Khore)의 문치(文治)에 의해 왕국은 반석 위에 올라섰는데, 그의 원력은 그의 왕국을 불국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만년에 그의 왕위를 조카에게 물려주고 직접 승가에 몸을 담아 불명을 라마 에세외(Yeshe-o″)라고 하였다 그는 신심 깊은 젊은이 21명을 선발하여 인도로 보내 범어를 배우고 불경을 가져 오게 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유명한 역경승으로 이름을 떨친 린첸장포였다.

그에 의하여 왕국에는 불음이 전국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고 사원도 지어졌다. 에세외의 뒤를 이은 조카 라데 왕도 불교를 장려하여 인도의 고승을 초빙하였는데 바로 비크라마시타 대학에서 온 유명한 학승인 아티샤(Athisha)였다. 그는 3년을 구게에 머물다가 중앙 티벳으로 가서 카담파학파를 세우니 이로부터 게룩파, 즉 달라이라마제도가 정착되며 4백년 간의 티베트의 분열시대가 끝나고 다시 고원에는 평화가 깃드는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