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늦은 만남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09-25     관리자

살다보면 꼭 만나고야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차례가 하루로 친다면 아침나절에 또는 한낮에 그리고 예측도 기대도 안한 저녁 무렵에 겨우 와서, 혹은 가서 만나고야 마는 것. 그 불확실성이 어쩌면 인생의 묘(妙)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나고야 말 것은 늦게라도 만난다는 것. 불교식 해석을 한다면 좋든 궂든, 바라든 안 바라든 인과응보의 결과로 처리되겠지만.
어머니는 쌀을 사오면 제일 먼저 절에 갖고 가실 공양미를 정갈히 담아서 따로 두셨고, 절에 가시기 며칠 전부터는 육식도 금하시고 다녀 오셔서는 늘 흐뭇한 얼굴로 “뭐하고 뭐를 정성껏 부처님께 빌었으니 꼭 들어 주실거야”는 등 마치 이웃집 아저씨한테 부탁이나 한 것처럼 만족스러워하셨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편하기도 하여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절에 동행한 적이 없다. 무관심도 있었지만 “빈다고 뭐가 이루어진다면 누구나 다 빌기만 하지….” 속으로 그 믿음의 단순성이 초등학교 산수 같아 우습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신앙이란, 특히 불교는 그 정체(正體)가 엄청 먼 곳에 있고, 합리적인 이해나 제어가 해당 안 되는 그야말로 미지수가 너무 많아 풀기 힘든 고등수학 같은 것.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했으니. 절은 언제나 원경(遠景)이고 스님은 그 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유니폼’을 입고 특이한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을 지키는 인간상으로만 비쳤다.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설치고 날뛰던 사람도 그 나이가 되면 살아온 둥지의 무게를 소중히 다지는데, 나는 그 지천명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결별하였다. 둥지를 뒤로 하고.
그 시기 - 방향조차 불투명했기에 돛도 내린 채 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은 시절 - 그러나 그것이 나의 적극적인 선택이었기에 힘들지만 우울하게 가라앉을 수는 없어 나는 나라는 인간의 개조를 시도하는 방법으로 독서를 택했으니 지난 일이지만 별로 이렇다 할 잘한 일이 없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인 것 같다.
원래 나의 독서법, 아니 독서벽은 잡식성다독형(雜食性多讀型)이라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책.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서예법첩(書藝法帖)의 하나인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라는 비문(碑文).
당의 현장삼장 법사(玄裝三藏法師)가 천축(天竺:지금의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전(佛典) 즉 성교(聖敎)를 새로 한역(漢譯)하여 당태종(唐太宗, 7세기)에게 바치고 서문(序文)을 하사받은 내용을 비문으로 새긴 것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현장 법사에 대해서 나는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그의 17년이라는 구법(求法) 취경(取經)의 여로. 귀국하여 실현시킨 역경이라는 대위업(大衛業). 그 노력, 용기, 집념의 발자국을 찾아 나는 대서점(大書店)을 두루 살폈으나 양이 차지 않아 일본까지 가서 서적을 구해왔다. 현장저(玄裝著)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근간으로 연결된 책들을 역시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어느덧 나는(착실한 불교의 기초 지식이 없는 탓으로) 미림(迷林)처럼 막막하던 경서(經書)의 세계가 향림(香林)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현장 법사의 피와 땀의 노력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그 위대한 가르침이 지금과 같이 아시아에서 퍼질 수 있었을까?
몇 년 전 인도를 여행하면서 실망한 것.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의 땅이요, 불교의 출발지인 그곳에 불교유적은 몇 곳밖엔 없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원, 신상(神像)들의 군림이 저주, 신비, 신음의 소리 없는 합창을 외치는 것 같아, 한낮에 으시시한 전율을 느꼈으니 이야말로 진정 무상(無常) 바로 그것이구나’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중국 주변의 한자문화권인 한국, 일본 등지에서 불교는 유교나 도교 등 중국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전통의 전파가 멈추지 않았으며, 각 민족의 지리적, 역사적 정세에 비추어 지엽적인 변용(變容)은 있었지만 일관하여 한역불전(漢譯佛典)이 성전(聖典)으로서 통용되었다는 공통성, 또 베트남의 불교수용사(佛敎受容史)나 ‘티벳 불교’가 그 형성기에 한역불전을 중역(重譯)하여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열풍에 사막의 지층이 무너져 푹 파인 모래함정에 자꾸 빠져들기만 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목마름에 탄 입술, 사진(砂塵)을 피해 눈을 감은 채 끝도 한도 없이 걸었을 현장, 그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겨워진다.
물론 불교는 그 종교적·철학적·사상적 정당성 때문에 현장삼장 법사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와 같은 몫을 후세의 인간들에게 제공하였겠지만, 그 질, 그 양을 그 어느 누가 따를 수 있었을까.
만화로부터 시작하여 어린이용, 어른용 서유기(西遊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나는 책으로 생각하며 읽었고 성질 급한 손오공을 늘 팔딱팔딱 뛰게 만드는 현장 법사의 답답한 언동이 짜증나던 어린 시절.
그러나 그와의 재회로 대서사시(大敍事詩)와도 같은 그의 생애를 알게 해 주었고 그것이 연장되어 불전의 세계로 인도하여 언제 싹텄는지조차 모르는 새, 내 불심의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주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신앙의 시작이 절의 예불, 성당의 미사, 개신교의 예배 등 대개 그 의식의 자리에서 다져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의 경우, 그 접근이 불전이나 선록(禪錄)인 탓인지, 절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 고찰을 찾으면 이 나라 불교의 수난 많았던 풍상의 세월이 헤아려져 주련(柱聯)의 바래진 글씨나 탑 등을 어루만져 주고 싶고 ‘용케 남아 이렇게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늘 아쉽다.
왜 이토록 늦게 만났을까.
좀더 일찍이 만났더라면 차라리 묵의(墨衣)에 몸을 감싼 출가인이 되었을텐데…. 그리하여 오가는 얼굴 모두 낯익은 마을의 나지막한 언덕에 작은 절을 지어(그 절의 문이란 문은 죄다 열려 있다) 모두 낯익은 그 소박한 얼굴의 임자들 마음에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등불을 켜느라고 됫박만한 성냥갑을 들고 올리 뛰고 내리 뛴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 나는 그만 소리내어 웃는다.
“길은 어디에나 있어.” 나는 어디선가 부처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아 두리번거린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태초에 길은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무엇을?
근래 여기저기서 열리는 불교강좌에 그런 대로 자주 가 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현장삼장 법사에 대한 언급은 들어 본 일이 없다.
할 수 없이 나는 내 나름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그의 ‘구법(求法), 취경(取經)의 여로(旅路)’로 시작하여 650여 부의 불전을 지참, 그 번역에 생애를 건 ‘위대한 삶’을 추구키로 마음먹고 여러 참고서적을 준비하고, 지금 그의 출생연대(出生年代)인 7세기 당태종 시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피는데, 연구라는 말은 좀 거창하지만 그런대로 힘들면서도 흥미로운 것이 많아 재미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으로 생각하니 무척 보람도 느끼고 이토록 늦은 만남을 메울 수 있는 기회로 알고 노력할 결심이다.
현장이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그 가상은 불교가 쇠퇴한 인도를 목격한 나를 짐짓 섬뜩하게 한다.
작은 힘이라도 바칠 수 있는 데까지 다해야지. 이를 나의 유일한 회향으로 알고….
내가 꿈꾸는 언덕 위의 작은 절. 혹시 내세(來世)에 그 차례가 아침나절에 올는지. 부처님의 미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