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성취되는 불상관 2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도법 11

2007-09-25     관리자

“저는 군포 신도시에 사는 올해 40세된 주부로 공무원입니다.
절에는 직장상사가 다녀볼 것을 권유하여 1989년 봄부터 서울 구룡산 밑에 위치한 모 사찰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절에서 기초교리반과 불교대학 과정을 졸업하여 어느정도 불교의 기초교리는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기초교리반 과정에서 불상의 유래와 불상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불상이 실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이 밖으로 발현된 모습이라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수학여행 때 관광지 사찰에서 호기심으로 보던 불상과는 달리 불법을 알고 나서 보는 불상이 이전과는 전혀 새롭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즉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직장일이나 동료와의 속상한 일이 있어 마음이 울적할 때,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불상을 바라보면 웬지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즈음부터 저는 절에 가면 불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불상을 바라볼 때 단지 생명없는 조형물로써의 불상이 아니라 ‘나와 불상은 하나다’라는 진리에 입각하여 불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즉 “거룩한 미소를 띤 저 불상은 실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과 나는 마음의 차원에서는 하나다”라는 시각으로 불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바로 불교의 탁월한 기도법 중에 하나인 불상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러한 기도법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웬지 마음이 끌려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현상을 자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날도 불교 교양대학의 강의 중에 법화경 강의를 들으며 불상을 바라보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망아상태(삼매의 경지)가 되면서 갑자기 눈앞에 마주보이던 불상들이 허공 속으로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대신 허공 속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연꽃들과 아주 조그마한 불상들이 수없이 나투어서 밤 하늘의 별처럼 법당의 허공 속에 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허공뿐만 아니라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곳, 그러니까 영가를 모신 영단에도 법당의 기둥에도 조그마한 연꽃과 모래알만한 크기의 빛나는 불상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밤 하늘에 빛나는 별빛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제가 기도를 드릴 때나 스님 법문을 들으며 불상을 바라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망아상태가 되면서 수없이 이런 황홀한 현상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이즈음 저에겐 또 한가지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곤 했는데, 제가 배가 아플 당시 불상을 바라보면 제가 아픈 부위와 똑같은 불상의 배 부위가 황금빛에서 잿빛으로 변색되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눈이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옆의 불자님에게 거듭 확인해 보았지만 그 분은 불상의 어느 부위에도 잿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금불상의 그 부위만 금빛이 아니라 약간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잿빛으로 보였습니다.
또 얼마가 지난 어느 날에는 생리통으로 심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는데 역시 그 상태에서 불상을 보니까 불상의 정수리 부분이 역시 금빛이 희미한 잿빛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제 마음이 울적하거나 직장일이나 대인관계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불상을 바라보면 역시 불상도 정확하게 제 현재의 심정대로 울적하게 보이거나 슬픔에 젖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1993년, 아직도 산골짜기엔 하얀 눈이 채 녹지도 않은 초봄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모 스님이 서울 정릉의 개인사찰을 인수하였을 때 그 분의 초대로 그곳에 가 보았습니다. 암자 주위는 여기저기 보수가 한창이라서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법당에는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예불을 드리고 나서 그 자리에 남아서 관세음보살님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관세음보살님 상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무심결에 바짝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보이지 않고 평상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착시현상인가 하고 다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니 다시 불상에서 두 줄기 눈물이 뚜렷이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눈물뿐만 아니라 표정까지도 슬픔에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를 예시하는 것 같아서 스님에게 암자 인수하려는 것을 좀더 신중하게 하라고 거듭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암자를 많은 돈을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그 지역의 포교활동에 의욕을 갖고 일을 추진하는 스님의 열정 앞에 제 염려하는 마음은 쉽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저의 불길한 생각은 현실이 되어 암자를 인수한 스님이 암주(庵主)와의 마찰로 떠나게 되고 그로 인해 암자 마저 폐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보인 관세음보살님상의 눈물은 아마 이런 불행한 일을 사전에 예감하고 흘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상이 실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제 속마음에서 흘린 눈물이 밖으로 표현된 불상에 투영되어 그렇게 보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불상은 내 본성의 반영이므로 나와 하나다’라며 바라보는 것이 바로 ‘불상관(佛相觀) 기도법’이라는 것도 몇 년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상관을 한 지 어느덧 십 년이 가까워 옵니다. 그 동안 ‘이런 현상이 불상관의 공덕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좀 특이한 사연들을 밝혀 드릴까 합니다.
저는 결혼하여 금년(1999년)에 네 살배기 아들이 있습니다. 임신하고서는 더욱 열심히 절에 다니며 불상관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태아는 평소 때는 심하게 발길질을 하고 몸트림을 하다가도 내가 불상관을 하며 삼매에 젖어들면 발길질도 하지 않고 아주 조용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놈이 태어나서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쯤부터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에서 기도하느라고 향을 피우면 향내 나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시늉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장에 혹이 있어서 수술을 하러 애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인데 아기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계속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까지 차로 이십여 분이 걸리는데 아기한테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 터인데 만 두 살도 안 되는 아이가 계속 이마를 시트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하늘로 뻗치고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엄마와 가장 밀접하게 기운 줄이 연결된 아기가 엄마의 위험요인을 민감하게 느끼고 무의식 중에 절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절을 하게 되면 모든 막혔던 혈이 열려서 보다 쉽게 내면의 힘을 발휘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절을 하게 되면 아기의 투명하고 맑은 내면의 에너지가 증폭되어 기운 줄이 연결된 엄마에게 상당히 좋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아기의 절 공덕 때문인지 그 날 저는 수술결과가 대단히 좋아서 두 시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꿈에 차를 몰고 가는데 웬 노인이 저희가 모는 차 앞을 가로막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승용차를 끌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 제 남편과 같이 차를 몰고 가는데 꿈 속에서 노인이 저희 차를 가로막았던 그 자리에서 차끼리 충돌사고가 일어났는지 그 주위의 길바닥에 온통 차유리 조각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사건을 미리 감지하여 사고예방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불상관의 공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상이나 달마 대사의 그림이 차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바라보며 성스러운 마음을 일으킨 그 심성 때문에 유유상종으로 불행한 사건이 개입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신문 하단에 커다랗게 ‘기운 나오는 달마 대사 단 돈 얼마’ ‘달마 대사 그림을 지갑에 소지하고 다니거나 차에 가지고 다니면 사고예방을 할 수 있다’ 라는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전체가 좋은 기운이 나오는 금수강산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주위에는 각종 불행한 사고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현상으로 볼 때 아무리 좋은 기운이 나오는 그림을 소장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좋은 쪽으로 닦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차창 백미러에 염주라든지 십자가 등을 매달고 다니면서 무사고 운행을 비는 순박한 신앙심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신앙물들에서도 물론 좋은 기운이 방사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신앙물보다 자신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런 신앙물보다 거룩한 상호의 부처님의 사진을 차 운전석에 붙여 두는 게 더 사고예방에 효과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상호의 부처님을 바라보게 되면 동일시법칙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 웬지 거룩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항상 불상관을 하게 되면 유유상종의 마음 법칙에 의해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불행한 사건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점술가를 찾아가서 운명을 진단하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불상관’을 권하고 싶습니다. 불상관을 열심히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거룩한 심성이 발현되고 거룩한 심성은 곧 거룩하고 밝은 운명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