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수기 공모 입상작] 불법은 나에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만남

▣ 신행수기 공모 입상작 ▣

2007-09-25     이운


95년 가을, 환절기라 그런지 평소에도 몸이 약한 둘째가 감기에 걸려서 수지뜸을 사러 수지침 지회가 있는 빌딩에 가게 되었다.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을의 쓸쓸한 기운에 젖어서 그랬는지 생각없이 엘리베이터 층번호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가 내린 복도는 그 동안 여러 번 방문하여 익숙한 복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벽에 붙어있는 한 장의 포스터는 나의 눈길을 머물게 했다.
‘불교교리 강좌’
시작한 지 1주일 남짓 지났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불교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오고 있던 터인지라 현관 문을 노크하게 되었다.
“여기서 불교 공부합니까? 불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처음인데 수강할 수 있습니까?” “들어 오십시오. 어느 절에 다니십니까?”
“아뇨. 저는 카톨릭 신자인데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있습니다. 종교가 다르면 배울 수 없나요?”“안에 스님께서 계시니 여쭈어 보세요.”
이렇게 해서 스님을 뵙게 되고 불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관계 사단법인에서 나오는 월간지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오후엔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을 하고 있던 나에게 1주일 3번이라는 시간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1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참석한 첫날의 강사는 40세가 넘어 불교학 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는 보살이었다. 내용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분이 박사 학위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경이로웠다. 나누어준 인쇄물을 살펴보아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전업주부로 있다 40세가 넘어 박사 학위에 도전할 수 있다는 데 더욱 불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생겼다.
연구실에 나가야 하는 날만 빼고 공부가 있는 날은 법당으로 갔다. 몇 년이 지난 뒤 스님께서 나를 다른 보살에게 소개할 때 절에 와서 졸기만 하는 보살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하러 가서는 앉자마자 졸기부터 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사죄합니다. 무지의 소치입니다. ”워낙 시간이 없다보니 12시 이후에 잠자리에 들고 오후 3시부터 학생들을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하니 새벽에 일어나 집안 일을 다 해놓고 공부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수업을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발걸음을 자꾸만 법당으로 향하게 했다. 스님의 강의는 조는 중에도 귀에 들어왔고 한잠 졸고나면 정신차려서 새로운 불법의 세계가 기쁨으로 가슴에 들어오곤 했다.
공부하는 동안 법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스님의 염불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아지면서 대중들과 함께하는 지심귀명례 예불문이 가슴 속에 스며들 듯이 좋아졌다. 저녁마다 하는 반야심경 사경 기도 덕택에 자연스럽게 반야심경을 외우고 스스로 불자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일요 법회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천주교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일요미사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나는 절에서 일요법회를 마치고 점심 공양도 하지 않은 채 바삐 나와 버스를 타려다 정류장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요즘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구역 예배에도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손에 들고 있는 예불문 책을 보여주면서 요즘 불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신앙생활이 충실해지고 나에게 맞는 종교를 찾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들은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천주교도 나에게 인연이 깊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역사도 찬연한 전통 고딕 양식의 웅장한 성당과 대구 주교관이 자리잡고 있는 카톨릭 사립학교였다. 그래서 6년 내내 날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점심밥을 먹었다. 그 영향으로 장래 희망을 조사하면 한 반의 절반 정도가 수녀되기를 희망했다. 한 학년이 2반 100명으로 내가 다닐 때는 여자만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였다. 교사 중에도 수녀님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카톨릭을 종교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이 카톨릭 신자인 아이들이 많았다. 친정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지만 지체장애자인 언니가 편하게 초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여자만 다니고 집에서 가까운 카톨릭계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서 나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에 있는 카톨리릭 여자 중고등학교 교사 채용 추천이 학교로 들어왔다. 시골이지만 카톨릭 계통이라는 데 매력을 느껴 면접을 보러갔고 채용되었다. 그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동료 수녀 선생님과 많은 접촉을 가지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영세를 받았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 힘들어 1년 뒤 도시 학교로 옮겨 집으로 돌아온 후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주변의 좋은 이웃 중에서 카톨릭 신자인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종교 생활에 신심이 나지 않았고 영세를 받았다는 사실이 항상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종교도 자신에게 인연이 있어야 신심이 난다는 것을 불교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누가 권하지도 않았고 우연히(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했다.) 만난 불법을 통하여 기도도 할 줄 알게 되고 또 기도 성취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불교와 만나 공부하면서 일요법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 해에는 큰애가 서울과학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었고 애들 아버지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관세사 자격 시험에 두 번째 도전하던 해였다. 나는 법당에서 기도할 때나 매일 잠자러 가기 전에 반야심경 사경기도를 하면서 아들의 과학고 입시 성취를 간절히 간구했다. 그 기도 성취를 큰 애 입시날 맛보았다.
입시 당일 날 큰애를 입시장에 데려다주니 정문에서 만난 친분있는 학부모들이 시험 끝날 때까지 근처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곧장 집으로 돌아오니 1교시 시험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시험 시간표를 앞에 두고 지장경을 읽으면서 기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머리가 맑지 못하고 자꾸만 잠이 쏟아져 깜빡깜빡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자신을 다그치면서 지장경을 소리내어 읽다가 소리의 힘이 없어지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번쩍 빛이 드는 듯 맑아졌다. 앞에 놓인 시계를 보니 1교시 끝나기 10분 전이었다. 환희심에 차서 지장경을 맑은 정신으로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큰애를 떠올리고 기도했다.
시험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큰애는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서 합격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첫째 시간에 수학문제를 푸는데 점수 배당이 큰 주관식 2문제가 풀리지 않아 고심하다가 1교시 끝나기 10분 전쯤 갑자기 풀이 과정이 환히 머리에 떠올랐다고 했다. 시간이 부족할세라 염려하면서 머리에 떠오른 풀이 과정을 일사천리로 쓰고 답을 표기하니 끝나는 벨이 울렸다고 했다.
큰애의 얘기를 듣는 순간 부처님의 가피력이 시험장에 있는 큰애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나는 집에서 기도할 때의 상태를 큰애에게 얘기해 주니 큰애도 좋아하면서 더욱 합격을 확신했다.
애들 아버지가 공부하고 있는 관세사 시험이 그 당시에는 2년에 한 번씩 있었고 평균 60점 이상에 과목별 낙제제도가 있는데다 인원을 제한하여 뽑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 해 700명이 응시하여 7명이 합격한 100:1의 어려운 관문을 최고령으로 통과하였다. 합격한 뒤 자신의 점수를 알아본 애들 아버지는 논문형 시험의 한 과목 점수가 41점이었다고 했다. 논문형은 채점에서 주관적인 요인이 있는데 채점관이 39점을 주지 않고 과락에 걸리지 않게 41점을 주어 합격했다고 좋아했다.
사실 난 남편의 시험 합격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남편은 안정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통과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과 욕심이 많으면 하나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피력은 우리 가족의 소망을 다 이루어주셨다.
아들의 합격 발표를 듣던 날 오후, 절에 가서 감사 공양을 올리고 지장보살 원불과 호법발원금을 신청했다. 두 아이에게 일요법회에 가서 부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자고 하니 순순히 따라왔다. 그런 뒤에 은연 중 아이들은 엄마 종교만 불교가 아니라 저들도 종교는 불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12월에 교육이 끝난 뒤 일요법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심을 키워나갔다. 다음 해 여름에 애들 아빠가 직장에서 오랫동안 바랬던 일이 이루어 졌다. 나도 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 강의 요청도 많아지고 점점 더 바쁘게 되었다. 그러자 교만심과 게으름이 발을 뻗쳐 일요법회에 빠지는 횟수가 잦아지고 잠들기 전에 기도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를 합리화했다. 불심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긴 대로 내 잣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라고 요구했다.
97년 늦가을 49년의 인생을 성처녀로 정말 남들에게 베풀기만 했던 삶을 살았던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병이 들어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선교단체에서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원래 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무리하게 했기에 병을 얻어 일찍 떠났다. 죽기 전에 언니는 친정 어머니에게 자신의 종교는 기독교이니 49재니 하는 의식을 하지 말고 화장을 해달라고 했다. 기독교에서는 매장을 하지만 처녀로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무덤을 돌보고 가꾸는 수고를 인연있는 이들에게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고 친구를 데리고 온다는 말이 있듯이 큰애는 2년 전에 그토록 원하여 입학했던 서울 과학고를 자퇴하겠다고 했다. 과학고에 다녀보니 과학자의 길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다른 전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입시 제도의 불이익 때문에 친구들이 자퇴를 많이 생각하고 있으니 자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고민한 뒤 자퇴를 시켰다.
자퇴원을 제출한 며칠 뒤 우리 나라는 I.M.F 경제체제에 들어가고 우울한 연말을 맞았다. 언니가 전생의 업으로 현세에서 지은 공덕으로 좋은 몸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니 언니의 죽음에 대하여 그토록 애통해 했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 동안 절에 가는 것이 뜸했던 나는 어려움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풀어보고자 다시 절을 찾았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불교 서적을 사서 읽고 차 속에서도 늘 불교 방송을 켜놓고 틈나는 대로 신심을 키웠다.
98년부터 애들 아버지도 나하고 같이 일요법회에 나가고 나보다 더 많이 불교 서적을 구해다 읽곤 했다. 큰애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여 정말 신이 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입시 전날 큰애는 나에게 시험치는 내내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남편이 큰애를 수능 고사장에 데려다 줄 동안 나는 집에서 기도할 준비를 했다. 집안을 대강 정리하고 전화기도 끄고 시계와 시간표를 앞에 놓았다. 지장경과 목탁을 갖다놓고 입시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수능은 하루종일 시험을 보기 때문에 기도도 하루종일 해야 한다. 큰애는 끝날 때까지 엄마가 기도해야 한다고 나에게 당부하고 나갔다. 나는 염려 말라고 너는 하루종일 시험 보는데 집에서 엄마가 그걸 못하겠느냐고 안심시켰다.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 공부라고 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보면 부처님의 크신 뜻에 감읍할 따름이다.
99년은 우리 부부가 신심을 키우는 특별한 해다. 3월에 우리 부부는 같이 수계를 받고 법명을 받았다. ‘묘관’과 ‘원명행’, 내가 처음 불교에 입문해서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스님께서 주신 법명이다.
올해 여름 휴가는 송광사에서 실시하는 수련회로 뜻있게 보냈다. 나는 정진반, 남편은 인욕반에서 4박 5일의 짧은 출가로 큰 깨달음의 시간을 보내면서 정말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본 가장 긴 시간으로 우리가 말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죄업을 짓고 시간을 낭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묵언을 하니 나 자신 속에 들어가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련회에 참석하여 스님들의 수행생활을 짧은 시간이나마 체험해 보면서 나의 나태한 신행 생활에 스스로 채찍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신행 생활에 회의가 생기고 게으름이 나면 사찰에서 행하는 수련회에 참석하여 자신을 돌아보라고 모든 재가 불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인도 성지 순례를 하면서 부처님을 더욱 가까이 느껴보고, 이 좋은 불법이 나와 인연있는 많은 분들에게 맺어져서 도반으로 함께 신행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마지막으로 육바라밀을 노래한 이광수 선생의 시‘애인’을 적어본다.

님에게서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임께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쉬일 새 없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에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직
임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임과 나의 존재도 잊을 때에
거기서 나는 지혜(智慧)를 배웠노라

인제 알았노라 임은
이 몸께 바라밀(波羅蜜)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툰 부처시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