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면서 독자에게

스님의 그늘

2007-09-25     관리자


‘스님의 그늘’을 연재하기 시작한지도 어언 5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격려해 주시고 혹은 비평을 해주시고, 또 궁금한 것을 물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낱낱이 답신을 드리지 못한 점 사과를 드립니다. 오늘은 그 중 한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이 연재를 마감하는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1. 염불과 왕생(往生)
임종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염송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죽은 이를 마중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데려 간다고 하는 가르침은 아미타경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정토왕생의 사상과 신앙이 뿌리를 내린 것은 중국의 당(唐)나라 선도(善導)에 의해서라고 한다.
염불과 왕생에 관한 선도의 기록은 도선(道善)이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 27권, 釋會通傳에 부기되어 있음)에 있다. 속고승전을 지은 도선은 596년에 태어나 667년에 입적하였으며 645(貞觀 19)년에 속고승전을 편찬하였다. 도선은 이 속고승전을 편찬함으로 해서 중국 굴지의 불교사학자로 불리울 뿐 아니라 중국 율종(律宗)을 대표하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을 세운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이 양(梁)의 초기로부터 속고승전의 편찬을 마친 645년까지 144년 동안의 고승 340인 중에 선도를 포함시킨 것은 선도가 그만큼 큰 선지식(善知識)임을 말해 주고 있다.
속고승전의 편찬을 끝냈을 때 도선의 나이는 50세, 선도는 겨우 32세의 젊은이였다. 속고승전은 이 젊은 선도의 교화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선도는 도작(道綽, 562 - 645)의 문하에 있었다. 도작은 처음 반야의 공사상을 연구하였으나 48세 때, 정토교로 돌아 매일 아미타불을 7만 번 염송하고 평생 무량수경을 2백 회가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이러한 도작을 선도가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0여 세 때였다. 그는 도작에게서 관무량수경의 강의를 듣고 정토신앙을 굳혀 끝내는 정토교를 크게 일으켰다.
그는 장안의 광명사 등에 머물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주로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외우는 구송염불(口頌念佛)을 권장하였다. 또한 아미타경 10만 권 이상을 사경(寫經)해서 신도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정토(淨土)의 변상도(變相圖)도 그려서 나누어주었다.
이 때, 사경의 끝에 선도가 쓴 발원문이 금세기 초, 도르판을 탐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어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선도는 그 발원문에서 “왕생을 원하는 비구 선도는 아미타경을 사경하면서 원하노니 모든 이가 다 함께 왕생하기를 발원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선도의 교화로 수없이 많은 승속(僧俗)의 신봉을 받는 선도가 어느 날, 광명사에서 설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구름처럼 모인 대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지금 부처님 명호를 염송(念誦)하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납니까”라고 물었다. 선도는 “염불을 하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납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사람은 선도에게 절을 하고 물러나 아미타불을 외우면서 광명사의 문을 나가 문 밖에 서 있는 나무에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몸을 던져 죽었다.
이 이야기는 도선이 속고승전을 탈고(脫稿)한 뒤에 추가로 보충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이유는 선도의 설법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살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도리어 곤혹스럽게 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선도의 설법이 확신에 찬 것임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컨대 ‘염불과 왕생’은 확고한 믿음이 있고서야 비로소 가능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상불경(常不輕) 보살
상불경(常不輕)을 한자대로 새기면 ‘항상 가벼이 하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범어 ‘사다파리부타’(Sadaparibhuta)의 한역(漢譯)으로서 그 본디 뜻은 ‘항상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반대로 항상 가벼이 하지 않는 ‘상불경’으로 바뀐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법화경을 번역할 때, 이 보살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점을 취해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상불경보살은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 등장하는 보살이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前身)으로서 과거세(過去世)의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입멸한 뒤에 출현한 보살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예배를 하고 찬탄을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기를 “나는 언제나 당신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람들은 찬탄하고 예배하는 보살이 자기들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때로는 칼과 몽둥이로 때리고 돌을 던졌다. 그래도 보살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성을 내지 않고 인내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사다파리부타’ 즉 ‘항상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축법호(竺法護)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과 동일한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상피경만(常被輕慢)보살’ 즉 ‘항상 경멸을 당하는 보살’이라고 번역했다.
이같이 번역자에 따라서 달리 표현된 보살의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우게 된 동기에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것이므로 존경한다고 하는 보살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인도의 유식학(唯識學)을 대성(大成)한 세친(世親)은 법화경 해설서에서 이 보살의 이름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근거가 되어서 초심자(初心者)나 사미 등, 새로 수행을 시작한 스님에게 예배하는 수행방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아직 비구계도 받지 않은, 속인이 받는 5계나 십선계(十善戒)나 다름이 없는 사미계를 받은 어린 사람에게까지 나이 많은 사람이 합장하고 예배하는 것은 이러한 수행의 관습이 전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 관습이 선가(禪家)에 전해져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낳고 있는데 새겨들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선승(禪僧)은 자기를 찾아와 말하는 사람이 어린이거나 어른이거나 노인이거나 여자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아주 진지하게 듣는다. 그리고 말이 끝나면 정중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서 “당신보다 더 큰 인물이 있으니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와서 말을 해도 진지하게 다 듣고 난 다음 지극한 존경심을 나타내고서 말하기를 “당신보다 더 큰 인물이 있으니 결코 자만하지 마시오”라고 한다. 또 여러 부처님과 보살을 예배한 다음에도 똑같이 “당신보다 더 큰 인물이 있으니 결코 자만하지 마시오”라고 한다.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이 선승의 설화에는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웃음을 자아내는 유모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처님과 보살을 향해서까지 ‘결코 자만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점이다. 제불보살(諸佛菩薩)을 향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 같이 ‘자만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전환(轉換)이다.
그 내면에는 자기를 향한 준엄한 경책(警策)이 숨어 있다. 마치 상불경보살이 남을 업수이 여기지 않음으로써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불성을 일깨우듯이, 선승은 자기의 내면에 있는 불성을 반어법을 써서 일깨우고 있다.
현대의 일본 기업인들은 중역과 사원들에게 소비자는 물론 잠재적 고객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결코 자만하지 말고 업수이 여기지 말라고 역설한다고 들었다. 이러한 경영전략은 오늘의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상불경보살의 교훈을 배운 보람이 아닌가 한다. 우리 나라 대기업의 경영자나 사원들 중에 대기업의 사원이라는 것만으로 자기가 남보다 훌륭하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있다면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3. 시비(是非)
정의에 불타는 사람, 정의감이 강한 사람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시비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불만이다. 내 생각에 시비를 하지 말라 한 것은 분별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내 말보다는 담천(曇遷, 542-607)의 말을 듣기로 한다.
담천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의하면 중국의 북쪽 땅에 섭론종(攝論宗)을 개창(開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가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섭론을 강의할 때, 담천보다 20세나 위인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이 듣고 크게 영향을 받아 학문의 길을 바꾸었다고 할 정도의 인물이다. 또한 담천은 당시의 황제인 문제(文帝)가 흠모해서 지방을 나들이할 때면 동행했고 가는 곳마다 섭론을 강의하였다. 그 때, 일부의 사람들이 황제의 총애와 영예(榮譽)를 탐닉하고 있다는 비난을 하였다. 담천은 이 비난에 대한 답으로 「망시비론(亡是非論)」을 썼다.
이 「망시비론」에서 담천은 말하기를 “본래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하고 자기를 선하다 하고 남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대부분이 그러하기 때문에 세상이 온통 논의(論議)가 혼란하고 스스로 바른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쪽에서는 우리가 옳다 하고 저쪽에서도 우리가 옳다고 해서 서로 맞서 싸우기 때문에 ‘옳은 것’의 설 자리가 없다. 또 저쪽에서 이쪽을 잘못했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또 저쪽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팽팽히 맞서 ‘잘못한 것’이 설자리를 없애버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혹한 사람은 정해진 것처럼 옳은 것〔是〕은 자기에게 돌리고 그른 것〔非〕은 상대방에게 돌리지만, 이것이 어떠한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근거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강변하는 사람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무심(無心)이 되면 무심인 이상,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르다 하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