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순례기] 25.고대왕국, 샹슝(象雄)

수미산 순례기 25

2007-09-25     김규현

샹슝 왕국의 도읍지, ‘쿵룽은셩(曲龍銀城)’떠날 때가 되었다. 한동안 머물렀던 이곳이 설사 우주의 신비가 가득한 우주의 중심일지라도 흰구름의 길을 따라가야만 하였다. 발 없는 흰구름도 흘러가는데 발이 달린 해동의 나그네야 마땅히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카레슈아! 카레페아(Goodbye).”

이번 생에 또 다시 이곳을 올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해야겠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구름 속의 카이라스 산은 묵묵부답일 뿐.

서쪽으로 뻗어나간 길은 광야 저편의 지평선으로 이어진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이룬 시냇물을 수 십 개나 건너 한나절 만에 도착한 작은 마을, 먼두(門土)에서 좌회전하여 온천으로 유명한 ‘딜타푸리(Tirthapuri)’사원에 도착하였다. 영험있는 온천으로 또 여러 종교의 성지로 그리고 고대왕국의 도읍지로 유명한 이곳은 그렇기에 옛부터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카이라스에서 발원하는 4대 강의 하나인 스투레지(Sutlej) 즉 상천하(象泉河)--후에 인도평원에서 간지스 본류와 합류하는 강--상류에 위치하기에 인도에서부터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를 피하여 티베트 고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순례자들에게는 성산 카이라스가 지척에 있었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그리하여 이곳, 딜타푸리는 일찍부터 각 종교마다 많은 의미가 부여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쉬바 신의 부인인 우마 여신의 성욕처(聖浴處)로서, 불교에서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빠드마삼바바 『티베트사자의 서』 의 저자로도 유명한 인도의 고승이다--의 수행처로서, 그리고 본포(Bonpo)교에서는 그들의 고대왕국, 샹승의 도읍지로 널리 알려졌다. 카이라스에 근거를 두고 있는 4대 종교 중 본포교(본교)는 19세기 유럽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그 베일이 조금은 벗겨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들은 신비에 싸여 있다.

불교의 전입 이전에 고대 티베트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였던 본포교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었나? 하는 의문은 그 넓은 티베트 땅을 순례하면서 그 하늘을 온통 덮다시피한 기원에의 오색깃발, ‘타루초’를 볼 때마다 느꼈던 화두였었기에 이렇게 그 본포교의 심장에 서서 수천년 역사의 이끼낀 유적지를 보고 있는 감회는 예사스럽지 않았다. 이 붉은 바위산과 동굴 투성이의 황량한 폐허가 본포교의 샤면(Shaman)이 지배하던 고대왕국의 천년의 도읍지, 쿵룽은성의 관문이란 말인가!

고대 마법사(魔法師)들의 왕국.

“옴 마 드리 무에 사레 두! 옴 마 드리 무에 사레 두! 옴 마 드리 무에 사레 두!” 마치 무슨 마법의 주문(呪文)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위의 진언은 불교의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옴 마니 반 메 훔) 에 해당되는 본포교의 만트라 즉 진언으로서 지금도 티베트에서 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 국토에서 펄럭이고 있는 오색 깃발은 가장 티베트적 특성이 두드러진 것인데 이것들은 원래 불교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전통신앙이었던 본포교의 상징물이었다. 그 외에도 본포교의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사회 전반에 걸쳐 산재해 있다. 그럼 도대체 오랫동안 불교국가로만 알려진 티베트에서 아직까지 잠재된 힘을 가지고 있는 본포교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여기서 잠시 해동의 독자들을 위해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너무나도 생소한 티베트의 전통 종교, 본포교와 그들의 본거지였던 샹슝 왕국을 간략히 요점정리해보기로 하자. 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문제 즉 우리 불교와 샤마니즘과의 함수관계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광대한 히말라야 주변에 태고적부터 자생한 민간신앙인 샤마니즘을 본포라는 다신교적 원시종교로 발전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약 BC 1세기 경에 나타난 센랍 미우체(Shenrab miwoche)였다. 그는 후에 본포교의 교조(敎祖)로 추앙받게 되지만 그의 인적 사항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본포교 경전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신비의 베일에 싸여져 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그가 티베트인이 아니라 아라비아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경전에 의하면 그는 신통력이 뛰어난 술사, 일종의 마법사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비행접시 같은 원반을 타고 날아서 카이라스 산의 정상에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그 산 기슭에서 수행을 하였기 때문에 그후에 카이라스 산은 그들의 성지가 되었다.

그 후 본포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비로소 종교의 형태를 갖추며 주변에 펴져 나갔는데, 초기의 본교는 교조 센랍의 고향인 대식국(大食國)-- 옛 페르시아 지방, 지금의 중앙아시아 남부 타지크 공화국에 해당된다 - 에서 성행하다가 후에 인더스 강을 따라 티베트 고원으로 본거지가 옮겨져 만개를 하기에 이른다.

이 제정일치(祭政一致) 형태의 고대왕국은 통일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부족연합체였는데 광대한 영토에 퍼져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중 중심되는 중샹슝국(中象雄國)이 바로 이곳에 도읍지를 두고 있었다. 이 종교왕국은 이웃 나라인 야릉왕조 - 티베트의 토번(吐蕃) 왕국의 전단계의 왕국 - 에게 병합되었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본포교도 따라서 본토에 전해지게 되어 본포교는 티베트 고원에 전통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뒤에 대제국이 된 토번 왕국에 불교가 수입됨에 따라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본포교와 외래종교인 불교는 피할 수 없는 기나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왕실이 불교 편을 들었던 토번 왕조의 전성기에는 본포교는 지하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다가 가끔씩 왕권의 비호 아래 반격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 두 종교의 다툼 때문에 토번 제국은 끝내 분열되고 말아 긴 어둠이 그 찬란하였던 문화를 이룩하였던 고원을 덮고 말았다.

그렇지만 새벽은 반드시 오는 법이던가. 종교개혁을 끝낸 개혁종단인 게룩파 즉 황모파(黃帽派)가 전국을 통일하여 라사의 포타라 궁에 달라이 라마 정부를 세우게 되니 티베트는 다시 정교(政敎)합일의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어 근세까지 내려오며 불교문화의 꽃을 만개시키게 되었다.

그 사이 본포교는 힘이 약화되고 그리고 대부분이 불교에 흡수되어 버려서 일부 지방, 계층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한 종교로서의 힘은 잃었지만 민간신앙으로서의 잠재력까지 잃은 것은 아니어서 지금도 불교내에서, 일상생활속에서 특히 티벳인들의 가슴속에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