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내가 가야 할 길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09-25     관리자


내 작업 세계는 주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여행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지난 해부터는 무엇을 만든다는 생각을 비워버렸다. 그냥 되도록 했다. 구도자의 구도 행각에서처럼 그냥 무심한 상태에서 찰나적인 작업을 했다.
불혹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내친김에 세계의 거장들이 거쳐간 조각의 도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0여 년간 조국을 떠나 이태리의 중부도시 지중해 휴양지가 있는 곳, 알프스 기슭 한 곳에서 연상되는 구상들을 작품으로 옮기기도 했다.
또 집에서 가까운 넓디 넓은 연밭에서 백련의 하얀 느낌을 대리석에 옮겨도 보았다. 유학생활이 힘들 때에는 달마 선사가 혜가 스님에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 끊어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을 없애라”고 하신 말씀과 “말과 마음과 행동이 스스로 죄를 짓는다”를 늘 생활 속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지중해 연안에서
내가 조각을 공부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을 들어간 것은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였다. 입시를 치르기 위해 대학문을 들어서려는데 수위아저씨가 학부모는 들어올 수 없다며 가로막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꽃 창작의 길을 가다가, 눕기도 하고 더러는 외로 토라지기도 했지만 꽃을 만나 꺾여진 가지의 여백을 관조하면서 꽃이 지닌 아름다움과 소박함을 배우고 있을 때 어느 미술대학 교수님의 충고가 있었다. 꽃을 제대로 꽂으려면 뎃생을 공부해야 한다고! 나는 그 충고에 힘입어 조형예술의 한 분야인 조각과를 지원하기 위해 미술학원에서 4년 동안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조각공부를 하면서 늦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은 7년 전 세계적인 휴양도시 프랑스 남부의 니스를 여행할 때 그곳에서 20km 거리에 있는 앙티브의 그리말디성에는 피카소가 그곳의 자연경관에 취해 1946년부터 죽을 때까지 머물면서 만든 수많은 도자기 작품들과 그림들, 그리고 조각품들을 비디오에 담으면서 이런 생각에 젖었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환경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새삼스러운 것이었지만 피카소의 삶이 도자기 속의 그림에 잘 담겨져 있었다.
꾸밈없이 즉흥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그의 작품세계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바닷가 모래 위에 또 자갈밭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옷을 벗기고 다리에, 가슴에, 또 하나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만든 도자기들을 야외로 옮겨가 꽃을 꽂는 행위는 작품 속의 주인공이었다.
피카소는 92살까지 살면서 지중해 바다로 돌출해 있는 언덕 위 성터에서 나이 먹는 줄 모르고 회화, 조각, 도자기 등을 수없이 해왔는데 그의 나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된 나에게도 어느 정도 희망을 찾아본다. 그 이후로 나는 자신감을 갖고 오늘을 살고 있다.
94년 가을 이태리에 이어 서울, 부산, 대구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때 국내의 여러 신문들과 잡지들은 앞다투어 나의 작품을 알려주었고, 제15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에서도 현대조각으로는 처음으로 30년 만에 첫 금상이 주어졌었다. 그러다가 96년 3월 어느날 훌쩍 인도 순례길에 올랐다 인도여행을 다녀와서 적었던 글을 여기에 한 번 옮겨본다. 

인도 순례길에서
작업을 하다가 어느날 훌쩍 인도 순례길에 올랐다. 히말라야 설산이 있는 다람살라에서 열흘간 달라이라마의 설법을 들으면서, 95년 한 해를 보내던 마지막날 밤을 생각했다. 그날 이태리의 티벳사원에서 부처님전에 꽃장엄을 하고 밤을 지새우다 무지개 꿈을 꾸었고 다음날 새해 첫날 집으로 돌아오는 피사(Pisa)의 구릉지대에서 꿈 속에서 본 무지개를 실제로 보았다.
인도의 티벳박물관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사진은 포탈라궁과 설산을 배경으로 무지개 아래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교감과 환희심을 느꼈다. 깨달음의 땅 부다가야의 니련선하 강변에서 끝없이 넓은 모래밭을 걸으면서 내 어머니 49재 기도 중 삼매에 들었을 때 넓고 넓은 은빛 모래밭이 순간 하얀 쌀로 변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했다.
새벽 별빛 아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선정에 잠겨 계시던 일곱 장소가 있는 대탑을 돌면서, 갠지스 강 가에서 몸을 태우는 사람들과 성스러운 물에 몸을 담그면 모든 죄가 씻긴다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목욕하는 사람들, 윤회로부터 해탈을 얻고자 강 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가 없음도 느꼈다.
견디기 어려운 열기속에 꼼짝없이 갇힌 채 36시간 동안을 가야 하는 기차안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인도에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따라 진리를 위해 오직 부처가 되기를 갈구하며 하염없이 순례의 길을 걸어도 보았다.

인도에서의 황금 같은 시간들
그리고는 다음 해인 97년 3월 시성 타골이 세운 학교에서 석사학위 과정으로 입학해 작업장을 인도에 하나 더 열었다.
작품구상에 대한 기운을 얻으려고 갔던 인도생활은 그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2년 동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물을 적게 마시려고 망고를 먹었다가 심한 알레르기로 혈관주사를 맞다 죽을 고비를 넘겼었고, 인도 음식을 먹어내지 못해 여행 중에 하루에 라면 하나씩을 보름 동안 먹다가 영양실조로 한국대사관 도움을 받았던 일, 기차 안에서 수면제를 탄 커피를 받아 마시다 그 쇼크로 10개월간 후유증이 있었던 일 등 2년 동안 나에겐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어느날 몸살감기약 처방이 강해 온몸이 마비가 되어 응급실로 실려갈 때 한국인 신부님, 스님 그리고 유학생들이 자전거로 한밤중 30km 거리의 병원으로 내 응급차 뒤를 따르던 행렬들이 먼 옛날의 일들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작업만은 주변의 사람들 말대로 초인처럼 해냈다. 외국인은 단 한 명밖에 허용되지 않는 대학원 과정을 48살인 나는 해냈었다.
나무로 불을 때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청동작업을 처음 시작부터 채색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해냈고 논문도 학교에서 요구한 대로 「나의 작업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제출했다. 작업을 하다가 풀리지 않을 때는 방학을 이용해서 이태리로 달려갔고 고맙게도 이태리에서는 장인들이 동양여인인 나에게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작업을 했던 덕분에 뉴델리 국립아카데미 미술관에서 한국대사관 후원으로 초대전도 갖게 되었고, 전시기간 중 97년에 왕궁꽃장엄 공문통과로 티벳인의 망명지 인도북부 다람살라의 히말라야 산으로 달려가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머물고 있는 저택과 사원에 꽃장엄을 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가 직접 선물도 주고, 웃으며 사진도 함께 찍었다. 5월 캘커타 초대전 때는 그곳의 원로교수 작가들이 나의 작품에 대한 평을 중국화풍의 육법으로 표현해주기도 했다. 그곳 교수들의 내 작품에 대한 진지한 평이 오래 여운이 남을 것 같다.
노벨상을 3개나 받았다는 캘거타, 인디라 간디가 공부했다는 곳, 시성 타골의 혼이 숨쉬고 있는 노천의 숲속 학교에는 오늘도 유치원에서 박사과정까지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모습들이 더위를 잊게 한다. 인도생활 2년은 나에겐 시련의 시간도 있었지만 황금 같은 시간도 있었다. 캘커타 전시기간 중 마더 테레사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선 테레사 수녀님 흉상을 만들어 보라며 자료도 주었다.

보살의 마음으로
지난 5월 중순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번에 만든 작품들을 보고 작품 전체 분위기가 천주교적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나는 천주교의 나라 이태리에서 불교적인 작품을 작업한 셈이 되고 불교의 나라에서는 천주교적인 작업을 한 셈이 된다.
나도 모르게 20여 년 전 가정적인 문제로 잠시 성당을 다니면서 영세를 받은 기억을 되살려본다. 세레명 베네딕다! 요즈음도 가끔씩 대모님은 말한다. 베네딕다 나 지옥 보낼래?
촛불 그리고 염주와 묵주, 두손 합장이 같은 불교와 천주교가 웬지 내겐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례명이 베네딕다. 불명이 보광화인 나는 어머니가 40살 때 불공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그냥 보살의 마음으로 남은 생을 세상을 밝히는 작은 등불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