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 - 도성제(道聖諦)

징검다리10

2007-09-25     관리자

사성제의 마지막은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를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는 원래 수행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방종하거나 고행하는 양극단을 피하라는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의 행위와 생각에 적용된다. 즉 중도를 보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감정으로든 생각으로든 아니면 행동으로든 무엇이든지 지나치지 말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이상화하지도 말고 그 반대로 부정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정도에 넘치면 반드시 화를 입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성제의 네 번째인 도제는 어느 극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여덟 가지 정도(正道)를 제시하고 그것이 곧 깨달음으로 가는 도(道)의 길임을 가르친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각 또는 이해, 올바른 생활수단, 올바른 노력, 올바른 집중, 올바른 선정.
사실 위에 나열한 팔정도는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만 제대로 훈련해도 나머지 행위들이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므로 여기에서는 올바른 견해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올바른 견해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이 바로 그릇된 견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매사를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와 남들이 나를 생각하는 모습은 같지 않다. 남들 또한 알고 보면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도 똑같이 나처럼 생각할 거라고 기대하면 그건 착각이다. 남편은 아내를 착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착각한다. 부모가 자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알고 보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착각이나 환상 없이는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의 믿음이나 착각이 깨어지면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누구 때문에 가슴 아프고 괴롭다고 말한다. 그들은 웬만해서 그 고통이 자신의 착각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그릇된 믿음이나 착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상대방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연장한다. 누구 때문에, 아니면 누가 어떠하기 때문에 번뇌하고 고통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두 가지 올바른 견해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우선 버려야 할 두 가지 그릇된 견해는 상대방이 실제로 내가 상상하고 판단하는 그런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생각과 내가 믿고 바라는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훈련해야 할 두 가지 올바른 견해는 세상의 누구도 내가 상상하고 판단하는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一切唯心造〕과 세상에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이다〔無常〕.
한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 또는 믿음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괴로워한다.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 이미지가 손상당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은 좀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못박고 거기에 어긋나는 자기 모습을 볼 때마다 불편해한다. 그들은 항상 ‘나’라고 하는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훈련해야 할 올바른 견해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 ‘나’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無我〕,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견해를 훈련하는 궁극적 이상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사물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고 상상하는 남편이나 아내, 자식, 친구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어느 한 모습으로 고정시켜서 집착하고 요구할 그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매달리고 집착하는 자아상 또한 진짜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보다 높은 공(空)의 이치를 터득하고 체험해가는 것이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의 핵심이며 최초의 설법이다. 사성제는 인간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치고 있다. 고통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욕망이며 욕망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인 욕망을 제거해야만 된다. 그런데 정신분석 이론은 인간의 욕망은 제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사회가 용인하는 형태로 인간의 욕망을 보다 바람직하게 전환해서 분출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회 자체가 정화되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사회에 순응해오기 보다는 도리어 사회를 욕망 표출의 장으로 변질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사회와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면서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달음질치고 있다.
기독교의 청교도 정신은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려고 시도했고 서양의 정신분석은 욕망의 힘을 지나치게 절대시 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욕망에 아무런 직접적인 시도를 보이지 않는다. 불교는 인간의 욕망 자체에 아무런 좋고 나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무지를 밝히는 일에 전념하므로써 욕망의 자연스런 소멸을 유도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 또한 알고 보면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욕망 자체를 뿌리뽑으려는 시도는 마치 그림자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