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무량공덕과 그 성취방법

보현행원품 강화3

2007-09-25     관리자


보현행원품의 경문은 우선 부처님의 공덕이 무량함을 말씀하고 있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량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하느니라.”

불교의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은 깨치신 분〔覺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인 것이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다. 무엇을 깨닫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영원·절대를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 보편임은 당연한 것이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때에, 진리를 깨달은 주관이 있고 그 주관에 의해 깨쳤다는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엄연히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깨달았다고 하는 말을 쓸 수 있으려면 깨달은 주체와 깨쳐진 객체가 따로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은 분을 부처님이라고 부른다면 그 부처님은 이미 진리 자체가 되어버린 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도, 장소에 따라서도 바뀌는 법이 없는 게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를 진여(眞如)라고도 부른다. 부처님은 진여와 하나이신 분이다. 그래서 ‘종여래생(從如來生)’ 곧 진리 자체로 오신 분이라 하여 여래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여래이시다. 여래는 절대보편의 진리이시므로 여래의 공덕 곧 그 능력을 말한다면 한마디로 무한(無限)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우주 자체의 생성과 운행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바로 진여의 활동 말고 무엇이 따로 있겠는가? 실로 모든 존재는 진여의 활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진여는 이제 여래로, 다시 부처님으로 인격화되었다. 그러니 온 세상 낱낱의 모든 현상이 부처님의 나투심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온 세상이 그대로 부처님의 공덕 바다인 것이다. 그래서 보현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공덕은 도저히 다 말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무량한 부처님의 공덕과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겠는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 어디에도 부처님의 공덕 밖의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태어나서는 늙고 병들고 죽는 우리들이다. 게다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업을 지어가며 애욕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들이다. 이러한 우리들과 부처님의 공덕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원래부터 부처님 공덕 밖에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부처님의 공덕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생사의 현상은 거짓 모양이고 우리 모두의 참생명은 그대로 부처님 생명인 것이다.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 생명이라면, 그 무량하다는 부처님 공덕은 실은 우리 모두의 참생명의 공덕 바로 그것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부처님은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참생명을 뜻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밖에서 따로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이미 우리 모두의 내면의 세계에 완벽한 공덕으로 살아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서 부처된다고 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우리의 참생명은 우리가 깨닫거나 깨닫지 않거나 관계없이 본래부터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완벽한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아도 된다. 먼저 깨달으셔서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우리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시 말해서 의심없이 믿는다면 그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신다.

“만약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열 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이 말씀은, “네가 다시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을 하거라”가 아니라, 그대로 네 생명의 본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나 할 수 있다. 깨닫기 위하여 가업(家業)이나 직업(職業)을 버리고 특별한 시설인 수행 도량, 예컨대 선방 같은 곳을 찾을 필요도 없다. 출가하신 분들이라면 모르거니와 생활인들 즉 재가자(在家者)들이 그러한 곳에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미 부처님께서 남김없이 밝혀주셨고, 그 무량공덕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셨다. 재가자들은 이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들여서 가정과 직장·사회에서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참으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열 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으라.”고 하셨지, 먼저 깨닫고 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이 행원을 닦는 데는 어떠한 전제 조건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격 조건의 제한이 없다. 필요한 것은 부처님을 믿고 가정생활을 하고 직장에도 나가며 사회생활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후일을 기약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실천하면 된다.
행원에는 열 가지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열 가지라 함은 무엇일까?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요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요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요
열 번째는 지은 바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니라.

무량한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려면 다시 말해서 성불하고자 하거든, 이 열 가지의 행원을 닦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열 가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하나 배워가기로 하거니와 이 자리에서 법우 여러분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열 가지가 결코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님의 공덕을 드러내는 덕목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 자신의 참생명의 본래적 생활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열 가지를 다 실천하는 것도 거룩한 일이지만 어느 하나를 철저하게 실천하면 그대로 그것이 열 가지 전체를 함께 실천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첫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대로가 진리 자체를 드러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거기에 거역할 수가 없다. 부처님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자기 생명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 고통은 남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원리가 그와 같이 작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바른 가치관(價値觀)에 대한 믿음이다. 보현행원의 내용을 보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실천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까지의 세속적 가치관이 그릇된 것이었던 것이지 보현행원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얼른 보기에는 손해보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참생명의 자기실현을 위한 크나큰 이익의 길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이것이 대승보살의 유일한 성불의 길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

경에서는 “과거·현재·미래세 일체 여래의 위없는 보리도인 모든 행원을 남김없이 공양하고 원만히 닦아 보현보살 큰행으로 보리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성불은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행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 행원의 실천이 결코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원의 실천은 실로 삼세 제불 제보살의 자비하신 호념 속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비 호념 속에 있으면서도 행원의 실천이 완벽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할지언정 자랑으로 내세우거나 내심으로 만심(慢心)을 품게 된다면 이는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거꾸로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룬다’함은 보현행원으로 ‘나 없음이 밝혀진다’는 말이다. 어느 때고 ‘나’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보현행원은 나의 공적(功績)일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