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佛光)’의 역사의식과 창간의 의미

월간 「불광」25년, 그흐름을 찾아서/혼돈 속의 한 줄기 녹색 신호등

2007-09-25     관리자


바라밀 사상의 첫싹
‘불광’지는 반야바라밀 사상의 메신저이다. 바라밀 사상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1974년 11월 종로3가 대각사 한 골방에서 74쪽짜리 단촐한 몸으로 녹색빛으로 태어났다.
반야바라밀 - 바라밀 사상은 대승의 근본으로 누가 주장하고 누가 천명할 것이 없는 실상 법문이다. 그러나 태양도 구름에 덮이면 잠시라도 빛이 가려지고, 금강(金剛)도 수렁에 빠지면 한 때라도 광명을 볼 수 없는 법 - 그래서 대중은 눈밝은 선지식을 기다리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시절인연의 신호등을 만나서야 약동의 수레를 굴리는 것이다. 광덕 스님은 우리 곁에 온 선지식이고 ‘불광’은 바라밀의 수레를 굴리는 녹색의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광덕 스님의 바라밀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불광’ 25년, 지령 300호의 흐름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작업의 하나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불광’ 탄생 11년 전, 1963년 ‘조선일보’에 게재된 스님의 단상(斷想) 한편을 소개함으로써 대중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 가운데에서는 이 글이 가장 오래된 공개적 발표라는 점에서, 바라밀의 첫싹〔萌芽〕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소중하게 생각된다.

영원의 빛 순화된 불교
현대에 적응하는 불교의 자세

불교 그것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각자(覺者)의 교설(敎說)이다. 이 불교는 한낱 경전문학(經典文學) 위에서만 볼 때 그는 구체적 사안에 대응하는 일종의 대병투약식(對病投藥式)의 처방문인 것이므로 그 처방문은 그 병세(病勢) 이외에는 적용되지 못하는 것이니, 따라서 그것은 그것으로 그 가치가 한정된다.
불교를 이러한 것으로 보는 데서 불교의 시대적 자세가 운위(云謂)된다. 그러나 불교를 이른바 팔만사천법문 처방문을 유출시킨 불교 자신의 안목에서 구할 때 그 의미는 완연히 달라진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낱낱 교법을 유출(流出)시킨 근원적인 존재, 즉 구체적 사안에 대응하는 밑바닥의 ‘그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의미의 불교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결코 시대적 산물이거나 가치의 한정을 용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불교가 ‘영원한 시대’에 적응하는 본연의 불교라 하겠다. 현대 과학기술의 고도적 발달과 제도 및 경제조직은 금일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위기 불안의식과 함께 허덕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실상안(實相眼)에서 볼 때 인간지주(人間支柱)의 상실 인간의 자기상실(自己喪失)을 의식한 선악과(善惡果)의 종말인가 한다. 여기에 당하여 우리는 영원히 푸른 자세로 ‘영원한 시대’에 적응하는 ‘실상불교(實相佛敎)’를 발견한다.
‘실상불교’ 그것은 만유(萬有)를 전일적(全一的)인 실존의 내용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 실상은 인간자성 절대무한자성체(絶對無限自性體)의 활동양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만중생의 것이다. 평등한 권위(權威)는 권위가 아니다. 여기서 보현행(普賢行)이 실상신(實相身)의 생리적(生理的) 원발(願發)임을 알게 된다. 순화된 불교 본래의 불교 이것은 ‘영원한 오늘’에 대응하는 불멸의 힘이며 영원의 힘임을 다시 한번 알게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63. 5. 21,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근현대사 하』
(1995,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 p. 277

순수불교, 순수역사의식
종교의 본질은 역사를 넘어선다.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그러나 그 초월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역사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과 그 실현도 마찬가지이다.
「불광」은 출발에서부터 매우 치열한 역사의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덕 스님은 창간사인 「순수불교선언(純粹佛敎宣言)」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헌데, 오늘날 우리의 세태는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로 이같이도 밝고 다사로운 햇빛인데, 인류의 앞길에는 첩첩이 불안의 구름이 가려보이는 것이다. 자원고갈, 환경파괴, 인구폭발, 이상기류, 기아만연, 전쟁위기, 게다가 극도로 거칠어진 무도덕(無道德)의 물결은 우리 주변 어느 한 구석도 안전지대로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 새 역사를 이룩하기 위하여 꿋꿋하게 일어서서 벅찬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불광」 1974. 11 - 창간호, p. 4

동일한 역사적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역사의식이 산출된다. 광덕 스님을 통하여 발로되는 ‘불광’의 역사의식의 특성은 한마디로 ‘주체적 순수 역사의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 세 가지 함의가 내포된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불교는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빛으로 상전(常轉)한다는 생각이다.
「조선일보」의 ‘영원의 빛 순화된 불교’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불교는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평가를 용납하지 아니하는 무한절대의 실상이라는 것을 큰 목소리로 주창하고 있다. 불교는 불교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일 뿐, 그 무엇에 의해서도 용훼될 수 없다는 이 고고하고 도도한 생각이 바로 순수불교의 그 순수성의 본질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순수의식은 「불광」 25주년을 관철해 온 기본적 정서로서, 불광 역사의식의 대전제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경제개발로 촉진된 계층간의 갈등, 군사독재에 대한 지식인·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 등, 70년대의 급변하는 사회적 변혁상황 속에서 속수무책인 채로 매도당하고 있던 한국 불교도들에게, 불광의 순수불교선언은 짓눌린 자존심을 희생시키고 긍지를 드높일 수 있는 희망의 녹색신호등이 아니겠는가.

“나는 무한자며 창조자다”
둘째, 인간의 가치는 무한절대한 것이며,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창조자며 규정자라는 생각이다.
‘영원의 빛’에서 광덕 스님은 “과학기술의 고도적 발달과 위압적(威壓的)인 제도 및 경제조직’이 불안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그 결과 ‘인간의 자기상실’을 초래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불광의 창간사 -
‘순수불교선언’ 첫머리에서 “부처님이 보신 바에는 인간은 어느 누구나 피조물이거나 상관적 존재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스님이 불교학의 전통적 개념인 연기론적(緣起論的) 존재론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창간호에 게재된 ‘한마음 헌장’에서 “그 ‘한마음’은 무상(無常)도 아니다. 무아(無我)도 아니다, 공(空)도 아니다, 법칙(法則)도 아니다.”(p. 12) “더욱이 인과(因果)며 업보(業報)가 있을 수 없다.”(p. 18)라고 천명함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연기론적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스님의 의식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스님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절대의 자존자(自存者)며 무한자(無限者)며 창조자(創造者)다”(p. 4)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큰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연기론과 업보사상에 순치되어 온 우리들로서는 당혹감마저 느낀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로 밝게 비추어 본 생명실상의 도리이겠거니와, 이 문제에 대한 교학적 논의는 하나의 과제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팎의 탈인간적 산물들에 의하여 인간가치를 겁탈당하고 기진맥진한 현대인들에게, 불광이 인간가치의 절대성과 역사 창조자로서의 인간의 주체성을 선언하고 나온 것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비굴에서 일어나 비상(飛翔)할 수 있는 하나의 희망찬 녹색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이 현실에서 행복을 실현하라
종교적 주장은 자칫 관념론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특히 불교는 그 본유의 유심적(唯心的) 속성 때문에 ‘마음 마음’ ‘심청정(心淸淨)’만 찾으며 현실을 맹목 긍정하거나 현실을 외면하며 명상(?)에 함입하는 몰현실적(沒現實的) 타성이 강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한마음 헌장’도 이런 점이 없지 않다. 거기에는 구체적 행위의 의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 끝부분에서는 이렇게 찬탄되고 있다.
“모두가 광명(光明), 자재(自在), 신통(神通), 묘용(妙用), 만권(萬權), 자존(自存), 지성(至聖), 지엄(至嚴), 지정(至淨), 지상(至祥), 지락(至樂), 지건(至健), 지강(至强), 지복(至福)” (p. 21)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모두 이렇지 않지 않은가?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되는 것인가? 역사의 창조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 문제를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음 호 불광(1974. 12)에서 ‘한마음 헌장’ 속편인 “나무후리다야(Nama Hrdaya)”의 끝마디를 이렇게 매듭짓고 있다.

“나여 너여 한마음이여 이 유무(有無)에서 뛰어난 한마음 얼굴.
궁겁의 태양 한마음 얼굴이 나와 우주와 생명 이전의 생명임을.
믿고 알고 환희, 찬탄, 감사로 열고 누리자, 이 자유 권위 신성 행복을.

“믿는 것이 있는 것이다.
행동이 믿는 것이다.”
「불광」 2호, 1974, 12 - p. 11)

“믿는 것이 있는 것이다. 행동이 믿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이왕의 불교적 관념주의로부터 불광을 살려내는 긴요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행동은 곧 시작되고 있었다. 창간호에서부터 ‘바라밀’이라는 제목으로 ‘행복의 법칙’이 연재되고 있다. 여기에서 ‘믿고 알고 환희 찬탄 감사’가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을 이끌어내는 구체적인 방법들로 - 바라밀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이후에 전개되는 불광의 모든 사업과 활동은 이 ‘5가지 행동의 법칙’의 실천이며 프로그램들인 것으로 정리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실로 매우 다행한 일로서, 이것에 의하여 불광 스스로 자전력(自轉力)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불광이 분명한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구체적인 역사창조의 행동법칙을 선언함으로써, 건전한 일상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 땅의 민중들이 이제 기복(祈福)의 어두운 수렁에서 벗어나 밝은 광명 천지로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Lets Go”를 외치는 희망찬 한 줄기 녹색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