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순례기] 24.‘달의 호수’와 ‘해의 호수’

수미산 순례기24

2007-09-25     김규현

금지된 국경도시, 포랑(布蘭, PoRang)으로

제한된 인도인 이외에는 금지된 길을 운전기사를 달래며 어렵사리 올라온 히말라야 산맥의 분수령인 굴라만다타(일명 나누나니, 7,728m) 아래의 고개에서 내려다 본 ‘달의 호수’, 라카스탈은 참으로 신비스러웠다. 

살아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아니 완전 정지된 진공상태 같았기에 그것은 아름답다는 차원을 넘어 어떤 슬픔 같은 것을 자아내게 하였다. 절벽까지 다가가 내려다 본 호수면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였다. 도대체 물이 고여 있다는 것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호수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처절하게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이 라카스탈은 무지와 어둠의 호수이고 선에 대항하는 악마의 호수인 것을, 창조의 호수가 아니고 파괴의 장소인 것을 이해하기에는 그곳은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 늘 혼자였던 해동의 나그네의 세 번째 수미산 순례길은 십여 명의 한국순례단과 함께였다. 비록 자격(?)없는 몇몇의 단원이 끼여 있어서 우여곡절을 거치긴 하였지만 쉬바신의 신벌만은 피하여 한 달간의 순례를 무사히 끝 마칠 수 있었다. 몇 몇 보살님들의 은덕 때문이었으리라. 덕분에 한국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 수미산의 전 코라, 즉 ‘산-돌이’ 53km를 완성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도 되었다.

각설하고 우리는 조용한 언덕에서 아침에 준비해간 김치겉절이를 우역우역 씹어 가며 점심을 먹으면서 너무나도 이상한 고요함에 말을 잃어 갔다. 차량과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고개를 조금만 내려가면 옛적부터 카이라스 순례자의 요충지인 국경도시 포랑이 나타나게 된다. 인도 땅이었던 50년 전에는 타크라코트라는 지명으로 널리 알려진 이 도시는 중국의 티벳 점령 후에는 고립된 군사도시가 되어 버렸다. 다만 중국·인도간의 협정에 의하여 일년에 3백 명만 이 길을 통과하여 순례길을 오를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은 옛적부터의 티벳의 관문인 포랑과 야둥(亞原) 대신 네팔 쪽의 장무(樟木) 한 곳만 남겨 두었기에 지금 이 유서 깊은 순례로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옛 인도의 순례자는 히말라야를 천신만고 끝에 도보로 넘어 와 처음 이 고개에서 호수 너머에 솟아 있는 카이라스 산을 마주 대하게 되고 그 발 밑에 꿇어 엎드린다. 그들에게 카이라스는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두려워 하는 쉬바(Shiva)신, 그 자체이기에 마주 올려다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고개에서 순례의 사자를 자신에게 보내준 쉬바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해 한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어 무서운 고산병과 풍토병이 기다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두 눈만은 카이라스에 고정시키고서…. 그들이 다음 도착하는 곳은 마나스 호수 가의 치우 사원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성욕(聖浴)을 하고 카이라스 산의 코라를 돌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쉬바신의 초청을 받은 행복한 자만이 올 수 있는 곳이라고 믿으며 감사하고 또 감사해 하며 코라에 들어가 쉬바신의 품에 안기게 된다.

탄트라(Tantra) 사상의 고향

앞에서 이미 풀이하였듯이, 이렇게 상반된 해와 달의 호수에 관한 이론은 바로 8C 전후하여 인도 대륙에 홀연히 나타나 전 인도의 철학, 종교, 예술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탄트라, 즉 밀교(密敎)와 지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선(善)과 빛과 지혜를 중요시하는 것 못지 않게 그의 상반되는 요소, 즉 악(惡)과 어둠과 무지도 중요시하는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무시되었고 배척되었던 것들까지도 진리의 한쪽 단면으로 여기고 동시에 추구하였던, 세계 사상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회오리바람이었다. 이 탄트라는 힌두·자이나·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12C 전후하여 인도대륙에 밀어 닥친 이슬람의 침공으로 탄트라와 결합된 불교 즉 밀종(密宗) 또는 금강승은 대승이나 소승과는 독자적으로 티벳고원에 자연적으로 밀려 들어와 지금 세계에서 지칭하는 티벳불교·속칭 라마교를 정착시키게 되지만 티벳불교에는 이외에도 토착종교인 본포교(BonPo)가 있어서 이 두 종교는 때로는 융합하고 때로는 배척하면서 지금의 티벳불교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하여 티벳불교는 세계 불교사에 특이한 위치를 잡게 되는 결과를 낳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세계불교사 가운데에는 카이라스와 그 아래 펼쳐있는 두 호수〔달과 해의 호수〕가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왜냐하면 탄트라의 이론적 모델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해와 달의 호수 그리고 카이라스 산은 음과 양, 나아가서 정적 에너지와 동적에너지로, 더 나아가 지혜와 자비, 침묵과 행위, 반야와 방편 등의 모든 탄트라 이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의 안식처

물도 흘러가야 하듯이, 나그네도 떠날때를 알아 스스로 떠나야 한다. 그것은 바로‘흰구름의 길’이 아니겠는가? 떠나고 싶지 않는 마나스 호수이지만 흰구름은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마음 정리도 할 겸, 꼭 들려야 할 지점이 있어서 반나절의 시간을 할애하여 남쪽 호수 가의 ‘체링마당’이라는 곳을 향하여 떠났다. 그곳 역시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맑은 물이 찰랑이고 있었으며 특유의 라마식 탑과 타루쵸가 휘날리고 있는 그냥 마나스의 일반적 풍경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이미 일단의 인도인들이 옷을 벗고 성욕(聖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행동은 목욕을 한다기보다 마치 무슨 종교행사를 치루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 곳이 바로 간디,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의 영원한 안식처였으니까….

대영 제국에 맞서 무저항의 아항사정신만으로 조국 인도를 해방시킨 그는 1947년 그의 최후를 예견하고 미리 안배를 하여 화장된 그의 유해 일부를 측근들에게 마나스 호수에 뿌리게 하였었다. 그곳이 바로 이 곳 ‘체링마당’이란 곳인 것이다.

그의 종교는 바로 이 곳에서 시작된 4대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교였으니까 당연한 안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비원(悲願)은 따로 있었다. 우리의 문무왕처럼 이 곳에서 용이 되어 조국의 하늘을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는 정말 용이 되어 호수에 지금도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