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 치하에서 ‘좇’ 수행의 맥을 지켜낸 몽골의 어머니 -

내가 감동한 밀교의 여성들5/돌징 칸돌마 보살 1

2007-09-24     관리자


공산국가가 되기(1921) 이전의 몽골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벳이나 부탄처럼 온 국민이 밀교를 신봉하는 열렬한 불교국가였다.
성인 남자 3명 중에 하나가 승려였고 승려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그 강렬한 에너지를 불교에 쏟아부었으니 밤하늘 고비사막의 별처럼 헤아릴수 없이 많은 대 마스터들이 나왔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최발싼은 그 엄청났던 몽골의 불교를 아주 흔적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쓸어버렸다. 돌징 칸돌마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공산의 그 처절하고 캄캄했던 암흑기에 몽골 탄트라 수행법의 중요한 한 맥을 지켜서 이어주었기에 그 어떤 위대한 마스터들보다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에 찾아온 인연
내가 돌징 칸돌마 보살을 친견하고 ‘좇’이며 ‘좇치’같은 용어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4년 겨울이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빈민국들을 떠돌면서 ‘지구상에 지속되고 있는 이 많은 인간들의 어려움을 잠시도 잊지 말자! 아무리 어려워도 쉬운 길보다는 보살도로 나가는 길을 선택하자!’는 서원을 세웠고 나름대로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몽골에 들어 왔지만 체제가 붕괴된 직후 극도의 혼란과 물자부족을 겪고 있는 몽골에서 승려의 아내로 더구나 젖먹이의 어미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에 부치던 때였다.
방과 후에도 스님과 함께 밤을 새며 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상주했고 조금만 인연이 있어도 거기 기대어 시골에서 찾아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묵고 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맨바닥에서 옷을 덮고 자는 사람들이 부엌바닥은 물론이고 통로 까지 가득 차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더러운 신발을 결코 벗으려고 하지 않는 그 많은 몽골사람들과 부대끼며 수도꼭지가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집에서 기어 다니는 젖먹이를 키우는데 물과 전기와 난방이 동시에 끊어지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몽골사람들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들보다 뭔가를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몹시도 부러워했고 일거수 일투족을 늘 동물처럼 구경당하며 살아야 했다.
채소라고는 감자 뿐인데 그것도 귀한 탓에 냄새가 역한 양고기만 먹자니 오랫동안 인도에서 채식을 하던 몸이 적응을 못하고 몇 달이 가도 설사가 그치질 않았다. 그러다가 혹독한 몽골의 겨울이 깊어지자 결국은 쓰러져 날짜가 어찌 가는 줄도 모르고 고열을 내면서 속수 무책으로 앓고 있었다.
어느 날 아띠야라는 학생의 어머니가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나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아띠야는 우리집에 상주하는 학생 중의 하나였는데 공부도 잘했지만 가사일에 엉거주춤한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요리며 빨래, 청소 등을 익숙하게 잘해서 나를 크게 도와 주었다.
아띠야가 가사일을 잘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고 집에 있어도 경전을 읽거나 수행만 하기 때문에 가사일을 주로 장남인 아띠야가 해왔기 때문이었다. 아띠야를 승가대학 학생으로 출가시킨 후 딸을 데리고 시골에 있는 스승한테 가서 살고 있다는 소릴 들었다.
처음 보는 아띠야의 어머니는 50대 초반으로 여느 시골 아낙처럼 때가 고질고질한 델(전통 몽골옷)을 입고 있었지만 단정한 자태에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로 인상이 고요하고 매우 정갈하였다. 이마를 붉은 띠로 동여매더니 때묻은 비단 보자기를 풀어 티벳어로 쓰여진 경전을 펼치고 무명을 손으로 누벼서 만든 감 안에서 인두골로 만든 커다란 다마루(의식용 손북)를 꺼냈다.
낡은 오색 비단에 아름다운 은장식들이 달린 다마루는 박물관의 진 열장에서 꺼내온 듯이 고색창연하였다. 다마루를 치며 음률을 넣어 경전을 암송하는데 경전을 그렇게 아름다운 음률로 암송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가슴에 사무쳐오는 노래 같기도 하고 달램 같기도 한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랫만에 고통을 잊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거푸 며칠을 와서 그렇게 경을 읽고 지성으로 기도를 한 탓인지 병세가 정말로 많이 호전이 되었다.
감사해 하는 내게 아띠야 어머니는 수행이 미약한 자신의 기도 덕이 아니라 스승인 돌징 칸돌마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한 덕이니 함께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돌징 칸돌마의 기사가 실린 영자신문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티벳불교 수행 공동체인 족첸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는 남케노부 린포체(환생이 확인된 큰스님)가 제자들과 몽골에 와서 돌징 칸돌마에게 ‘좇’의 수행법을 전수받은 내용으로 84세된 돌징 칸돌마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살아 남은 거목
‘좇’은 확실한 스승을 만날 수 있고 계율만 철저히 지킨다면 승속과 남녀를 불문하고 매우 효과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몽골의 독특한 탄트라 수행법이다.
그 기원은 탄트라의 대 마스터로 티벳불교의 뿌리를 심은 인도인 빠뜨마 쌈봐바와 티벳에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칭해지는 여성 마스터, 마직랍된마를 거쳐 내려온 티벳 닝마파(故派, 赤帽派)의 오래된 수행법이다.
돌징은 그토록 무섭게 불교를 탄압했던 혹독한 공산치하에서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비밀리에 ‘좇’의 수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징 칸돌마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돌징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응하고 법력으로 그들을 치유해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좇’의 수행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훨씬 이전이었지만 경찰도 그냥 묵인 하였다.
1990년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마침내 불교에 자유가 오자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브리아트 몽골 공화국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불법에 목마른 브리아트인들을 위해 대법회를 열었다. 돌징 칸돌마가 행하는 이적들로 인해 모여든 시주금 전액으로 브리아트에 대탑(大塔) 불사를 일으키고 돌아왔다. 남케노부 린포체에 의해 유럽의 불교계에 알려지자 브리아트와 러시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유럽사람들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몽골의 불교는 너무나 긴 세월 동안 계속된 공산정권의 붉은 불에 거의 다 타버려서 재만 남은 시커먼 숲을 대하는 듯이 황량하고 서글펐었다. 그런데 그 잿더미 속에 그런 거목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스승은 남편을 섬긴 아낙으로 자식을 넷이나 낳은 어머니라는 사실이, 자식 낳기를 말썽처럼 저질러버린 나에게 특별한 희망과 기대를 주었다.

‘좇’과 ‘좇치’들의 수행 ‘쨔르쨔’
돌징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있었다. 부모들은 모두 ‘좇’을 수행하는 ‘좇치’들이었다. 돌징이 서너 살 되던 해에 수행이 어느 경지에 이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제자와 결혼해서 셋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끊임없이 안거 수행에 드시는 아버지를 시봉했고 아버지는 새아버지와 어머니를 계속 지도하였다. 돌징이 기억하는 그들의 생활이란 끊임없이 불공의식을 행하고 경을 읽고 공부하며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돌징이 9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제일 중요한 스승이 된 이시갸쵸 스님으로부터 봐주라 요기니의 수행법을 전수 받고 집을 떠나 한 달 동안 수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좇치’가 되려면 ‘쨔르쨔’를 수행해야 했다. 120일을 단위로 인적이 전혀 없는 높은 산과 황야와 묘지, 시체 버리는 곳 등을 떠돌며 행하는 수행법이다. 상당히 힘도 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몇 명씩 모아서 보내다가 스승이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제자는 혼자서 보낸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좇치’로 입문한 돌징은 스승의 허락으로 13살이 되던 해에 다른 13명의 선배 ‘좇치’들과 첫 번째 짜르쨔 수행을 떠났다.
몽골에는 고기와 유제품 외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어서 승려들에게도 고기가 주식이지만 ‘쨔르쨔’를 행하는 기간 동안 ‘좇치’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우유차와 소량의 밀가루과자, 쌀밥, 유제품 등을 오전에만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묵언을 해야하며 끊임없이 입에 진언을 달고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제발로 걸어다녀야지 말을 타서는 안 된다. ‘쨔르쨔’의 첫 번째 7일과 세 번째 7일은 마이한(몽골의 이동식 텐트)을 치고 한 장소에 머물며 하루 4회의 불공의식을 올린다. 진언을 외우고 다마루를 치는 소리가 7일 내내 밤낮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나머지 기간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같은 장소에서 하룻밤 이상 지내지 않는다.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으로 곧장 걸어가지 않고 뱀처럼 지그재그로 돌면서 도달한다. 도달하고 나면 북쪽을 향해 한쪽 다리를 들고 서서 다키니의 춤을 추어 올린 후 남쪽과 북쪽을 향해 기도문을 염송하고 10방의 신들에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수행할 수 있는 허락과 축복을 구한다.
아침에 떠날 때도 곧장 걸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시 뱀처럼 지그재그로 돌아서 나온다. 한 번의 ‘쨔르쨔’를 행하는 동안 ‘좇치’들은 120개의 강과 내를 건너고 산을 오르며 각각의 강과 내와 산으로부터 돌을 한 개씩 모아서 ‘쨔르쨔’가 끝나면 성스러운 장소를 택해 오보(한국의 서낭당과 비슷한 기능의 돌무더기)를 하나씩 쌓아야 한다. 수행 중인 ‘좇치’들은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른다.
이 붉은 띠는 닝마파의 수행자들이 의식을 행할 때 머리에 쓰는 반자릭아라는 황금관을 상징한다. 반자릭아에는 만달라의 5불이 모셔져 있다. 반자릭아를 쓰거나 붉은 띠를 두르는 것은 스승과 불보살을 머리 위에 고이 모시고 순간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순간마다 보살의 마음이 되고 순간마다 보살의 몸이 되고자 명상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