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 해탈 법문 - 보현행원

보현행원품 강의1

2007-09-24     관리자

보현 보살께서 선재 동자(우리 모든 구도자를 대표한다)에게 열어 주신 열 가지 행원의 법문은 그대로 불가사의 해탈 법문이다. 이 법문에 의지하여 그 길을 갈 때, 절대 자유의 광명 천지는 거기에 활짝 열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가 처한 환경이 어떠한 것이든, 그가 당면한 문제가 어떠한 것이든, 그의 생활 조건과 능력이 어떠한 것이든 아무 상관없이 어떠한 구속도 제한도 받음이 없는 절대자유의 세계가 시원스러이 열리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럴까? 보살은 이 행원의 실천에 의하여 그의 참 생명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참 생명이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육신(肉身)을 자기 생명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육신에는 생·노·병·사가 있다. 그리고 육신에는 대립이 있다. 이 대립은 곧 생존 경쟁으로 이어진다. 이리하여 육신은 비극의 역사를 전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로병사와 생존 경쟁의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물질인 육체가 어찌 이 비극에서 해방될 수 있겠는가? 육신을 나라고 하여 그에 집착하는 한 이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육신은 결코 우리의 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 이 육신은 우리 참 생명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겨남이 나의 참 생명의 생겨남이 아니며, 육신의 죽음이 나의 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육신에 얽매여 지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갓 착각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착각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는가? 착각은 진실을 알게 될 때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육신의 한계 곧 생사는 진실 앞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이 착각은 어두움인 까닭에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광명이다. 이 광명이 곧 마하반야이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의미하며 무한 촉광의 광명이라는 뜻이 된다. 무한 촉광인 까닭에 어떠한 어두움도 존재할 수 없다. 일체의 한계는 말끔히 사라진다. 한계는 곧 울타리이다.
마하반야의 광명 앞에는 울타리 없는 무한 세계가 전개된다. 부처님의 지혜 광명 곧 마하반야의 세계는 그대로 바라밀이다. 바라밀이란 말을 ‘저 언덕에 이르른다’고 하여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생사 없는 저 언덕에 있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뜻이 된다. 아직도 우리들은 어두운 까닭에 이 바라밀의 세계를 오직 신앙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바라밀 신앙의 깊이와 그 강도에 따라 그만큼 우리 생명의 한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관념의 세계에서 바라밀을 믿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생활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그 가치가 충분히 드러내지지 않는다. 이 바라밀 신앙을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 보현행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는 실천인 것이다. 보현행원을 해석할 때, “나는 아주 잊어 버리고 오직 일체 중생을 위하여 산다”(성철 스님)고 한다. 본래 마하반야의 광명 앞에는 나와 남의 대립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라밀의 세계는 온통 일인칭(一人稱)의 세계인 것이다. 남들과 대립된 나도 없고, 나와 대립된 남도 없다. 남인 듯 여겨졌던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처럼 보이는 나를 해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아가는 것은 그 모든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대립하여 있는 나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모두가 본래부터 남이 아닌 나인 본체 중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바라밀 신앙의 경험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보현행원은 생명 존중의 극치이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논의되고 있는 과제 가운데 인간 존중이라는 것이 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을 존중한다고 할 때에 그 인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밝혀진 일이 있는가? 기껏해야 동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생각해서 그 동물적 본능 존중 또는 생리적 생존 연장 이외의 무엇을 현대 인류는 생각하였다는 것인가?
소위 복지사회라는 것도 그 범위를 벗어남이 아니요, 경영학상의 인간관계론에서도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그 주안점이었을 뿐이다.
그보다도 근원적이랄 수 있는 교육제도는 어떻다 할 것인가? 참 생명 육성을 위한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무제한의 경쟁사회에서 남보다 나은 사회적 지위 내지는 물질적 윤택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실정이라면 그 교육의 결과가 어떠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유물적인 생명관에 입각한 것으로 결국 인간 생명의 모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가 근대화된 이래 끊임없이 이상으로 추구되어 온 것이 자유와 평등의 동시 실현이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고 살 때 자연스럽게 불평등이 드러난다. 한편 평등을 중시하다 보면 자유가 억압받게 되는 것이 사회적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드러나서 인간 세계에는 평화가 깃들 날이 없다. 그뿐인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모순 말고도 혈연에 관계된 민족 또는 종족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작금 세계 각처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민족 문제에 기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디 그뿐인가? 정신적 자유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종교조차도 분쟁의 원인이 되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는가? 이 모든 모순과 갈등·투쟁 등은 모두가 근본적으로 인간 생명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잘못된 데에 기인한다. 이 생명관의 오류는 작게는 가정 생활에서부터 크게는 직장 생활·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싸움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자기 계산에 맞을때에만 있는 것이고 계산이 맞지 않을 때에는 당장 미움으로 바뀌어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인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투쟁과 갈등·증오와 저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길이 있는 것인가? 있다. 해답은 바로 보현행원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보현행원에서 가르치는 한 가지 한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대립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동일생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물질로 대하지 않고 불성 그 자체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 평화낙원을 건설하는 길이 이 길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보현행원의 실천밖에는 달리 길이 있을 수 없다.
보현행원의 실천에는 대전제가 하나 붙는다. 그것은 앞에서 보아온 바라밀 신앙이다. 바라밀 세계에 본적을 옮겨놓은 이만이 보현행원을 실천할 수 있다. 바라밀 신앙으로 자기 생명의 본래의 입각처가 바라밀 세계라는 것을 확신함이 없이는 보현행원의 실천은 불가능하다. 어느 덕목(德目)을 외형적으로 실천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근본에 있어 바라밀 세계에 발을 딛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그 덕목의 실천은 필경 공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리적인 실천이 어찌 보현 정토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라밀은 신앙하면서 보현의 행을 실천하지 아니할 때 그 신앙은 결코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경에서는 “보현보살 큰 행으로 보리 이루리”라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보현행원으로 보리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수행 도량(道場)은 어디이겠는가? 보현행원 이전까지 투쟁의 장이었던 가정과 직장과 사회가 그대로 성스러운 보현도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떠나서는 보현행이 실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현행원 실천의 도반(道伴)은 누구이며 행원실천을 이끌어 줄 선지식(善知識)은 누구이겠는가? 나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형제 동포 말고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여태까지 삶의 적(敵)으로만 알고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 행원 앞에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도반이요, 선지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도 불가사의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보현행원의 실천으로 우리의 국토와 환경 그리고 주변에 함께 더불어 사는 모든 인연있는 이들이 바로 성화(聖化)되는 것이다. 여기에 불가사의한 해탈 법문인 보현행원의 진면목(眞面目)이 있게 된다.
불자 형제들이여! 다 같이 이 법문에 신심을 내어 함께 읽고 함께 실천해서 이 땅에 불국 정토를 건설하자. 우리는 결코 환경에 지배받는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 절대자유의 주체로서 환경을 성화시켜 가는 보살들이다. 환경이 나쁘게 보이는 것은 그 환경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현행자는 환경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보현행원 앞에 나쁜 환경이란 있을 수 없다. 보현행원이 실천되는 곳은 거룩한 도량인 것이다.
다 같이 보현행원을 배우고 실천하자.
나무 보현 보살 마하살
나무 마하 반야 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