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벳학의 처녀지를 개척한 열린 마음의 탐험가 -

내가 감동한 밀교의 여성들3/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

2007-09-24     관리자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유별난 삶

용기있는 모험과 도전으로 19세기 프랑스 최대의 탐험가로 꼽히며 엄청난 양의 저술과 번역으로 티벳학의 처녀지를 개척하여 르종 드뇌르 훈장을 수여받은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은 놀랍게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당시 티벳은 수백 년 동안 외국인들의 접근을 허락치 않던 금단의 땅이었고 만년설의 험준한 산맥들로 둘러싸여 세상에서 격리되어 있던 신비의 나라였다.
알렉산드라가 티벳의 깊숙한 수도 라싸의 땅을 백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밟았던 그 시대(1924년, 56세)의 유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여성의 활동이 제약을 받던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사회였고 더욱이 1, 2차 대전으로 세계가 들끓던 험난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티벳에 목숨을 걸고 탐험해 들어간 사람은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만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을 야만인들로 간주하고 교육, 선물, 의료사업 등을 수단으로 서구의 종교로 개화시키겠다고 들어간 그들에게 티벳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안목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는 정반대로 열린 마음, 열린 눈으로 그들의 문화를 찬탄하며 깊이깊이 젖어 들어가 마침내 티벳과 서양을 잇는 튼튼한 첫 다리를 놓았던 여성,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는 1868년 파리 근교에서 중산층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이미 10대 소녀시절부터 툭하면 무단가출, 결혼반지를 끼고 유부녀로 가장하여 스위스나 이탈리아 등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다 전보를 치곤 하였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좋은 데 시집 가기는 글러먹은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그렇게 부모들의 속을 썩이던 문제아는 20살에 집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살았다.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의 건물에 살면서 도서관에 파묻혀 몇 년 동안 그 방면의 책을 읽었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의 번역본을 통해 놀라운 인도철학의 세계를 들여다본 그녀는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저명한 산스크리트 학자였던 설리반 레비와 에드워드 훤카욱스 교수를 찾아 파리로 갔다. 소르본느 대학을 오가며 산스크리트와 불교를 공부하던 중 뜻밖에 얼마간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소원하고 꿈꾸던 동양을 향해서 떠날 돈이 생긴 것이다. 당차고 용감한 스물세 살의 처녀는 혼자서 스리랑카로 가는 배에 올랐다. 스리랑카를 여행한 후 인도로 건너가 마두라이, 베나레스 등을 여행하며

여러 명의 사두들과 사귀고 베단타 철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신명나게 1년 반을 돌아다니다가 돈이 다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파리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전처럼 좋아하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업에 크게 실패한 부모들은 더 이상 말썽 많은 딸의 뒷바라지를 해줄 수가 없게 되었다. 뭐라도 해서 스스로 살아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아름답고 뛰어난 소프라노 목소리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던 그녀는 한동안 성악 수업을 받더니 오페라 가수로 데뷔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오페라 가수가 되었지만 본인은 한때나마 가수 노릇을 했다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여 애써 감추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후에야 드러난 사실이었다.일찌감치 웬만한 타이틀을 하나 얻으면 싫거나 좋거나 그 타이틀에 늘어붙어 맞추면서 사는 것이 보통의 인생이다. 내가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자라는 한계를 무릅쓰고 이루어낸 업적도 대단하지만 주어진 타이틀에 주저앉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간 여자라는 것 때문이다.
틈만 나면 불교와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고 있던 이상한 오페라 가수는 당시 오페라 가수들 특유의 말씨나 행동거지며 사치하며 호사스러운 생활방식 등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사회에 제대로 끼어들지 못했고 늘 지방이나 해외의 무대에나 설 수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하노이로 간 그녀는 그곳에서 일약 오페라의 스타가 되었고 불교국가에 있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산스크리트와 불교를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결혼 하노이에서 2년간 살다가 튜니지아로 간 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하기 싫은 오페라 가수 노릇을 마침내 그만두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쓰고 있던 이 유별난 노처녀는 필립 닐이라는 철도 기술자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비상식적이고 유별난 결혼이었다. 알렉산드라가 철도기술 분야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것처럼 필립 역시 알렉산드라가 추구하는 세계를 이해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가 그렇게도 좋아했고 죽을 때까지 부부였지만 함께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부부였다.
결혼식을 올리고 5주 만에 알렉산드라는 파리에 일자리가 생겨 필립을 떠나야 했다. 그들을 연결해준 것은 필립이 알렉산드라에게 평생토록 지원해준 여행경비와 알렉산드라가 필립에게 보낸 수천 통의 길고 긴 편지들이었다. 1911년 그녀의 나이 43세, 남편의 경제적인 후원과 환송을 받으면서 알렉산드라는 두 번째로 인도를 향해 떠났다. 8개월간만 다녀오기로 하고….
그러나 8개월은 장장 14년이라는 길고 긴 여정이 되었다. 마드라스로 가서 신지학회에 잠시 머문 후 캘커타를 거쳐 동부 히말라야의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칼림풍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녀는 스리랑카 불교와는 전혀 다르고 그 때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티벳 불교를 만난다.
또한 칼림풍에 일시적으로 망명해 있던 13대 달라이라마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행운과 영광도 누렸다. 불교에 관한 그녀의 높은 식견과 진지함에 감동한 시킴의 황태자가 주선해 준 덕이었다. 칼림풍에서 가까운 시킴은 히말라야의 샹그릴라라고 불렸던 작고 아름다운 불교 왕국이다. 티벳과 인접해 있어서 티벳 불교를 믿었고 많은 티벳 사람들과 티벳 승려들이 내려와 살고 있었다.
시킴에서 동양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섞여 어울리면서 우월한 백인의 이미지와 권위를 손상시키는 알렉산드라의 행위는 식민지의 지배자로 군림해 살고 있던 그곳 영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속물적인 영국 부르조아들과 어울리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라며 그들을 무시해 버렸다. 시킴에 있는 동안 그녀는 여러 차례 국경지대로 올라가 티벳 땅을 넘겨다 보았다. 그 황량한 미지의 땅이 강한 매력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합법적으로는 국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당시 군사력이 전혀 없던 티벳은 남으로는 히말라야 밑까지 바짝 밀고 들어와 있는 영국과 동북쪽에서 티벳 영토를 야금야금 잘라먹으며 침범해 들어오고 있던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며 그들 사이의 비무장지대로서 서구인의 출입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다. 더구나 1차대전을 앞두고 국제정세가 온통 긴장돼 있던 때였다.
남편에게 쓴 편지에 “그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도록 안타깝다.”고 했다. 1913년 알렉산드라는 바라나시로 내려가 산스크리트 공부에 몰두했다(45세). 동틀녘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나면 목욕 후 간단한 식사를 하고 8시에 산스크리트 교사가 와서 점심 때까지 공부하고 오후의 4시간은 싸치난다라는 요가와 함께 베단타를 공부하는 것이 그녀의 정해진 일과였다. 해질 무렵이면 산야신들의 오렌지색 수도복을 입고 갠지스 강 가를 산책하며 강 가에 줄지어 늘어선 사원들을 참배했다. 당시 인도의 사원은 불경스런 백인들의 출입을 절대로 금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녀의 높은 학식과 진지한 태도에 감동한 브라만들과 학자들은 그녀가 자유롭게 사원을 드나들고 의식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힌두교도들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도들로부터도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특히 지역주민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요청에 의해 대중들에게 불교를 강연하기도 하였는데 바라나시에서 불교가 설해진 것은 11세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설산수행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시킴의 국경에서 넘겨다본 티벳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1914년 마음을 다져 먹고 다시 시킴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14세된 욘텐이라는 티벳 소년을 고용했고 본격적으로 티벳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심오한 학문적 깊이와 지혜,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라면서 지극히 존경하던 라첸이라는 티벳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티벳식 명상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라 일행은 해발 4천 미터에 위치한 탕구의 동굴에 기거하다가 11월이 되면 라첸 스님의 절로 돌아와 겨울을 지났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티벳 국경의 데와탕에 위치한 해발 3천 미터 되는 산 위에다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식량을 지고 올라가 겨울을 났다(47세).
남편에게 쓴 편지에 “이 외지고 쓸쓸한 고원의 투명한 공기 덕분에 나는 더 깊은 명상에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 동양학계에서 나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아래서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많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추구하는 또 한 가지는 아주 신비롭고 영적인 것이라서 사랑하는 당신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라고 했는데 그녀는 필시 심오한 티벳의 밀교수행에 입문해 들어갔던 것이리라.
독한 인내심만 가지고는 해발 3천미터의 설산에서 겨울을 날 수가 없다. 알렉산드라도 ‘두메’라는 내열을 닦는 명상수행을 해야 했다. 티벳의 설산수행자들이 통과해야 하는 두메 수행은 배꼽 안쪽에 위치한 챠크라를 열어 그 속에 잠자고 있는 불씨를 살려내는 명상법이다. 겨울 강 가에 벌거벗고 앉아 얼음물에 적신 가사를 몸에 감아 하룻밤에 몇 차례씩 말려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열을 내지만 잘못하면 척추 안의 골수가 파열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수행법이다.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알렉산드라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매우 외진 곳의 강 가로 혼자서 멀리 걸어갔다. 옷을 벗고 얼기 시작하는 차가운 강물 속으로 들어가 목욕을 한 다음 물기조차 닦지 않은 나체로 꼼짝하지 않고 밤새도록 앉아서 명상을 했다. 알렉산드라는 감기조차 걸리지 않고 자랑스럽게 이 과정을 해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