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프론티어 보살 문성 공주님

내가 감동한 밀교의 여성들 2

2007-09-24     관리자

달라이라마의 티벳정부가 망명해 있는 북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티벳불화와 만다라를 공부하다가 한 비범한 몽골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밀교미술의 껍데기만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그 심오한 상징의 내면들을 조금씩 열어보여 주면서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몽골도 티벳 같은 불교국가였다. 티벳보다 뛰어난 밀교미술의 전통이 있었다. 공산화 때문에 잠시 죽었던 그 전통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함께 몽골로 가서 불교미술학교를 만들고 사람을 키우자. 다람살라에서는 배울 수 없는 밀교미술의 진수를 가르쳐 주겠다. 보시행도 하고 방법도 제대로 배워야 그림을 통한 수행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70년에 걸친 공산정권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황폐화 시켜버리고는 마침내 붕괴된 직후, 모든 것이 몹시도 궁핍하고 어수선했던 지난 94년에 몽골에 들어왔다. 스님을 도와 학교를 만들어 꾸려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재미있는 공부도 하고 있다.
여기서 하는 모든 일들은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 발휘할 수 있는 멋지고 신나는 일이고 동시에 복까지 짓는 참 자랑스럽고 좋은 일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몽골에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 때가 있다. 기후가 다르고 낙후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다람살라라고 해서 그다지 나을 것도 없었다.
파리가 들끓는 인도 농가의 외양간 위에 살면서도 나는 충만감을 느꼈었다. 거기에는 나에게 에너지를 퍼부어 주는 여러 성자와 수행자와 눈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도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요소들이 오히려 더 많다.
그래서인지 인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던 척박한 생활환경조차 고달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라면서 먹은 음식과 뜨끈한 온돌과 사우나 생각이 나고 한국과 다람살라의 여러 가지 불교문화적인 분위기들이 그리워진다. 그런 것들 없이 여기서 견뎌내려면 스스로 나의 내면 에너지를 길어올려야만 한다. 그렇게 에너지를 길어올리는 두레박 같은 분. 떠올리면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내게 커다란 위안을 주고 확신을 준 공주님 한 분이 계시다.
내가 닮고 싶은 문성공주님은 지금부터 약 1천 3백년 전에 티벳으로 시집을 가신 당나라 태종의 따님이시다. 공주께서 시집을 가시던 그 때 티벳에는 불교가 아직 전래되지 않았었고, 그래서 티벳사람들이 지금처럼 비록 가난하지만 매우 온화하고 신비로운 종교적 품성을 지닌 그런 매력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춥고 건조한 고원의 황무지를 떠돌며 고기만을 먹고 사는 유목민들은 그 성품도 야생의 금수들처럼 거칠고 포악했으며 만년설의 거칠은 산맥들로 둘러싸여 바깥세상의 문화 흐름에서 소외된 채 거의 야만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공주님을 처음 만난 곳은 티벳의 수도 라싸에 있는 쪼캉 사원이었다. 10년 전에 여러 나라에서 모인 10명의 서양인들과 어렵사리 티벳에 들어갔는데 티벳의 가장 오래된 불상인 *쪼(근본)석가모니불을 모신 쪼캉은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이기 때문에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순례객들로 대단히 붐비고 있었다.
티벳인을 감시하는 형사로 파견된 중국인이 외국인의 안내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러 방들을 거쳐 송첸감포 대왕이 모셔져 있는 방으로 안내됐다. 송첸감포 대왕은 티벳을 네팔과 당나라까지 위협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통일시키고 불교신자인 양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처음으로 티벳에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성왕(聖王)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대왕의 좌우에 모셔진 두 왕비의 조각상 중에 중국옷을 입은 왕비가 바로 쪼(근본)석가모니를 모시고 당나라에서 시집을 온 문성공주라고 했다. 안내를 하던 중국 형사는 네팔왕비와 중국왕비가 대왕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하여 어떻게 경쟁을 했는가에 대하여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공주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나중에 몽골에 와서 티벳의 불교미술사를 공부하면서였다. 내가 본 티벳의 모든 미술문화사 책들은 한결같이 문성공주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티벳 불교예술의 전통은 문성공주로 인해서 시작됐다. 당나라 공주가 눈의 나라 티벳에 처음으로 불교경전들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경전뿐만 아니라 천문학, 풍수지리, 의학, 신학 등 18종의 과학 서적들과 자료들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공주는 당나라에서 데려온 여러 장인들을 거느리고 풍수지리법으로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암벽에 경문과 불상을 암각하고 대형 탑과 불상을 수도 없이 조성하면서 서부와 중부 티벳에 불교미술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주는 티벳 전역을 끊임없이 순례하며 가는 곳마다 불사를 하면서 평생을 티벳에서 마쳤다. 공주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어떤 형태로든 불사가 시작됐고 그 불사들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내가 티벳에 간 것은 여름이 한창이었던 7월이었는데도 냉랭한 공기 때문에 코감기가 걸린 것처럼 늘 코와 앞머리가 띵하게 아프고 으슬으슬 추웠다. 또한 높은 고도로 인해 몸과 정신을 추스리기가 어려웠었다. 요즘도 그런데 하물며 그 당시에 티벳의 구석구석을 여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기와 역겨운 유제품 외에는 먹을 것도 없었을텐데 장안의 대명관(大明官)에서 먹던 싱싱한 푸성귀 요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티벳의 시골에 현지의 장인이나 예술가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하나의 불사를 해내기 위해서 공주는 오랜 시간들을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여러 곳에 불사를 했는지 그 유적이 아직도 다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근세에 이르러 중국이 티벳을 그렇게도 유린했건만 티벳사람들은 여전히 문성공주를 쵸패마(바다의 연꽃)라고 부르며 모든 일에서 높고 순결한 덕성을 보여준 타라의 화신으로 여긴다.
공주가 정말 타라의 화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지고한 헌신과 서원을 어여삐 여긴 타라와 같은 강력한 영적 존재들의 가피를 받았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시무시한 토속신들을 섬기는 검은 주술과 무속이 판을 치고 있었던 거칠은 티벳 고원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외래신을 위한 불사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업적의 찬란함은 후세의 결론일 뿐이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멀고도 거친 땅으로 얼굴도 모르는 야만국의 왕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 장안을 떠나던 시점에서 공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랑하는 딸을 화친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물로 야만국에 시집보내야만 했던 태종은 “나의 눈과 같이 사랑하는 딸을 보낸다”고 하며 금은 비단으로 꾸민 가마에 공주를 태우고 3명의 장군과 병사들이 수호하게 하며 아름다운 40명의 시녀들을 말에 태워 보내면서 그래도 얼마나 얼마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면 나라에서 가장 아끼는 쪼(근본) 석가모니불을 함께 보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 때 공주의 나이는 20대였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처음부터 70이 다 되어가는 늙은 송첸감포의 왕비로 간 것은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송첸감포의 아들 쿵손쿵젠왕과 혼인한 것인데 3년이 못되서 쿵손쿵젠왕이 죽었다. 형제나 아들이 죽으면 그들의 아내를 도맡아 사는 유목민족의 풍습에 따라 다시 왕위에 오른 노 대왕 송첸감포와 재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교를 국책으로 삼았던 당나라에서 자란 공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악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남편이 됐든 통역이 없이는 대화도 할 수 없고, 설사 말이 통한들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을 공감할 수 있었겠는가. 문화와 정서의 기반이 그렇게도 다른데…. 현학적인 담론과 법담을 나누며 영특한 공주의 주변에 모여들던 친구며 도반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텔레비전 화면이나 사진으로 들여다 보는 티벳이야 재미있지만 실제로 가보면 지금이나 그 때나 억쇠풀만 듬성듬성 자라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고원의 벌판이다.
그러나 공주가 나고 자란 장안은 다들 알듯이 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호화롭고 아름다운 국제도시였다. 그 춥고 쓸쓸한 무채색의 고원에서 공주는 무엇으로 향수를 풀 수 있었을까? 역사의 연표를 짚어보면 공주는 자신의 혼사가 결정되기 몇 년 전 인물과 지성이 출중했다는 현장 스님이 태종의 반대를 무릅쓰고 머나먼 나라 인도를 향해 장안으로 떠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혹시 불심깊은 공주가 현장 스님을 사모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도 머나먼 나라로 떠나오게 된 공주가 혼신을 다해 불사를 한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본다.
노대왕 송첸감포도 죽고 친정 아버지 태종도 죽었다. 친정인 당나라와 티벳의 화친은 지속되지 못해 전쟁이 빈발했고 대명국의 친정오빠들은 공주의 아들인 망룬망젠 왕을 그다지 취급해 주지 않았다. 한 여자의 인생으로만 본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그 유난한 삶을 공주는 찬란한 불꽃으로 피워올렸다.
공주가 그렇게 불교의 씨를 뿌리고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시작하면서 티벳에서는 불교가 제대로 자라기 시작했다. 공주의 증손자인 티송테젠 대왕은 스스로 신심이 뜨거웠던 진정한 불교의 성왕이었다. 대왕은 티벳에 불교의 승단을 최초로 설립하고 인도에서 샨타락실라, 빠뜨마쌈봐바와 같은 대 마스터들을 초빙해다 국사로 삼고 수많은 젊은 승려들을 인도로 보내고 경전을 번역하고 놀라운 규모의 대사원인 삼예사를 세웠고 모든 왕족과 권신들에게 숭불의 서약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자라나온 티벳의 불교와 문화는 오늘날 세상 밖으로 나와 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려낼 수 있는 신선한 해결책으로 인식되어 선진국들의 지성층 사이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