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홍서원

2004-01-26     관리자




불교에는 총원(總願)이라 불리우는 네 가지 큰 원(願=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이 그것으로 불교를 믿는 분들은 언제나 이 네 가지 큰 서원을 이정표로 삼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내용은 중생이 아무리 끝이 없어도 맹세코 제도하며(衆生無邊誓願度), 번뇌가 아무리 많아도 맹세코 모두 끊고(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이 아무리 한량없어도 맹세코 모두 배우며(法門無量誓願學). 불도가 아무리 높아도 맹세코 이루겠다(佛道無上誓願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홍서원은 단순히 불교 수행의 목적이나 이정표일뿐 아니라, 우리가 원을 일으켜 수행으로 나아가 성불하게 되는 과정과 순서를 그대로 요약한 것이 바로 사홍서원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마음을 낸 이는 선립청정원(先立淸淨願), 수습보살행(修習菩薩行)이란 말이 있듯, 수행에 앞서 원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은 처음부터 부처 되겠다, 성불하겠다, 깨닫겠다, 이런 것보다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가 되는 것이지, 부처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하기 위해서이지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일체를 안락하게 하겠다, 하는 마음을 먼저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낸 후 나를 돌아다보니, 나는 중생을 구제할 만한 힘도, 자격도 없습니다. 남을 도우려면 무언가 가진 게 있어야 합니다. 재물이 없다면 마음이라도 부자라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재물도 마음도 모두 부자가 아닙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외롭고 무력한 일개 중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 있다면 오직 번뇌뿐! 번뇌만 가득한 그 모습이 중생 구제라는 거창한 구호를 세운 나의 꾸밈없는 현재의 실상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의 번뇌를 끊으리라...'하는 서원이 이어서 나오게 됩니다. 번뇌를 끊어, 마음이나마 부자가 되어 저 가난한 이들을 모두 공양하리라!!! 이것이 번뇌를 끊는 서원이 두 번째에 나오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번뇌를 끊고 마침내 중생 공양을 나가려다 보면, 번뇌 없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막상 중생을 제도하려 나아가 보면 일단은 번뇌 없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하나, 중생 구제에는 도구, 방편이 절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비유를 들고, 방편으로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그 방편이 무엇인가? 불법에서는 바로 법문, 즉 부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 내용입니다.


아무리 내가 아는 게 많아도, 아무리 내가 깨친 것이 수미산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알아듣기 쉽게 체계를 갖춰야 비로소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나만 알고 나만 이해해서는 남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아는 내용을 구체적, 체계적으로 남에게 설명할 수 있고 증명이 가능할 때 아는 게 없는 분들도 비로소 알게 되고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생사를 뛰어 넘는 데는 지혜만 필요하고 지식은 필요 없을지 모르나, 남을 깨우치고 알려 줄 때는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현실적인 지식이 따라야 평범한 분들도 알아듣고 실천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는 법문이 아무리 끝없어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법문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면 이제는 우리 모두 궁극의 목표로 나아가야 할지니, 그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행위는 모두 유위법(有位法, 한계가 있는 가르침)이라 생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우리는 부처의 자리, 부처님 품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중생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구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홍서원은 불도를 구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부처를 이루어 부처의 자리에서 중생을 구하고, 부처의 자리에서 번뇌를 끊고, 부처의 자리에서 법문을 배우며 부처의 자리에서 부처를 구한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큰 원들은 일체 중생이 구제될 때까지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무변(無邊)하고 번뇌가 무진(無盡)하며 법문이 무량(無量)하며 나의 서원도 다함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야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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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