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를 위하여

엽편소설

2007-09-24     관리자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과의 식사시간은 늘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밥때가 되면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어지럽다며 제 방에 틀어박혀 있고는 했다. 하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녀석의 속셈을 빤히 알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햄버거나 치킨, 피자 따위에 식욕을 느낄 터이니 늘 비슷한 반찬에 그렇고 그런 찌개가 전부인 식탁에 앉아있는 게 여간 고역이었으랴. 어쩌면 배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는 핑계는 꾀병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
본래 무뚝뚝한 성격을 타고난 남편은 식탁에서도 씹고 삼키는 일 빼놓고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 편이다. 남편은 아이들의 식사습관에 대해선 군대처럼 엄한 규율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규칙적인 식사, 밥을 소리내어 씹는 일, 편식하는 일, 밥알을 남기는 일, 식탁에 앉는 자세 등 아이들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습관을 고쳐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랬다.
모처럼 제 시간에 퇴근한 남편과 더불어 오랜만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하교를 한 뒤 이것저것 군것질을 하고 난 아이가 처음부터 제 아빠의 심기를 건드려 놓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밥을 먹으라고 불렀는데 숙제가 바쁘다며 꼼짝 않더니 식탁에 앉아서도 밥알을 세고 있었다. 나도 그런 편이지만 남편도 밥을 ‘께작께작’ 먹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너 밥 먹기 싫으면 일어서! 그렇게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마침내 남편의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빨리 일어서지 못해?”
이따금씩 그런 일이 생기고는 했다.
남편은 말로 안 되는 건 제 스스로의 체험으로 배우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을 종종 하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아이의 숙제를 함께 풀어주거나 장난감 따위로 어수선한 녀석의 방을 정리해 주려고 하면 질색을 했다. 숙제를 못해 벌을 받든 장바닥처럼 어지럽혀진 방에서 잠을 자든 그냥 내버려두라는 식이었다. 그런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가를 몸소 깨달아야 버릇을 고칠 수 있다는 게 남편의 주장이다.
밥을 먹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계집애인데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그것도 적지 않게 먹어대는 둘째와는 달리 큰 아이는 어쩐지 입이 짧은 편이었다. 물론 이웃집 아이들처럼 패스트푸드에 완전히 길들여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군것질이 잦은데다 밥보다는 햄버거를, 된장보다는 치즈를 더 좋아하는 게 문제였다.
남편이 그런 것까지 간섭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식사시간에 반찬투정을 한다든지, 마지못해 먹는다든지, 밥을 먹다 말고 남긴다든지 하는 버릇만큼은 쉽사리 보아주질 않았다. 식사라는 것은 단순히 고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삶을 삶답게 지탱시키는 구체적인 행위이자 경건한 의식(儀式)이라는 것이 남편의 지론이었다. 남편의, 숟가락 놓고 일어서라는 호통은 그 경건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교육 방법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배가 쫄쫄 고픈 게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알게 하자는 것이다.
제 아빠의 불 같은 성격을 익히 아는 녀석은 이내 자세를 바로잡은 뒤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떠넣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의 역정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야, 임마! 내 말 안 들려? 숟갈 놓고 일어서란 말야.”
입에 넣은 밥을 오물오물 씹던 녀석은 마침내 고개를 숙인 채 비쩍 마른 몸을 일으켰다.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걸…화를 내구 그래?”
당장 당혹스럽기도 했고, 가슴 한 구석이 휑해진 내가 아이의 역성을 들었다.
“화를 내? 북한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는 마당인데 무슨 배부른 소리야?”
새로 만들어 살짝 익힌 김치 겉절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남편이 말했다.
“아빤 또 북한 어린이야?”
제 오빠가 꾸지람을 듣다 쫓겨나는 걸 보면서도 열심히 수저를 놀리고 있던 둘째가 끼어 들었다.
“그러게 말이지.”

사실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북한 사람들의 실상은 남편이 아이들의 식사습관을 바로잡는 좋은 빌미가 돼 왔다. 더욱이 지난 연말에 방영됐던 ‘꽃제비’들의 참담한 모습은 북한의 식량난과 기아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실감나게 만들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간접적인 보도나 탈북자들의 증언만으로 전해지던 소식을 생중계로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기아에 허덕이던 한 탈북자가 어떤 뜻있는 단체의 지원을 받아 취재장비를 몰래 숨긴 채 다시 북한에 잠입해 ‘목숨을 걸고’ 찍었다는 화면이었다.
늦가을의 장터에서 우산도 없이, 맨발로, 그 진흙탕 속에 떨어진 밥알을 한 알 두 알 주워 먹는 꽃제비들의 처절한 모습은 어떤 언설로도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아이들이 저 아프리카 대륙의 난민일지라도 같은 인간이며 중생이라는 입장에서 더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이 생길텐데, 하물며 그들은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말을 쓰는 한민족이 아닌가. 대체 인간의 삶에서 체제와 이념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극단적이고 서글픈 장벽을 반 백년이 넘도록 드리워놓고 살아야 하는지.
그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숨죽여 보던 남편이 혼자 중얼거렸다.
“저럴 바에야 차라리 밀고 올라가 해방을 시키지, 햇볕 정책은 무슨….”
극단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당시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그들이 이 지상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끝까지 유지하든 핵무기로 강대국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국민의 절대다수를 굶주림이라는, 본능적인 절망과 위기 속으로 밀어 넣는 그 무능력하고 까탈 맞은 위정자들과 무슨 대화를 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을 포용한단 말인가.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남편은 밥을 께작거리는 아들을 꾸짖을 때마다 그 꽃제비들을 들먹이고는 했다.
“너 북한 어린이들 봤지? 어떻게 하든? 먹을 게 없어서 시궁창을 뒤져 음식 찌꺼기 집어먹는 것 생각나지?”
적어도 그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 두어 달 정도는 이 말 한마디로 녀석의 식생활에 훌륭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라 자꾸 꽃제비로 아들을 자극시키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아빠 여긴 북한이 아니잖아요? 먹기 싫을 땐 안 먹을 수도 있다구 생각해요.”
얼마 전 녀석은 그렇게 말대꾸를 했다가 남편에게 30분이 넘도록 벌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그 습관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 녀석도 문제였지만 그럴 바엔 아예 밥을 굶겨야 한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는 남편 사이에 낀 나만 애가 타기 시작했다.
“당신, 저 녀석 내일 아침도 굶기고 간식도 절대 주지 말라구! 알았지?”
딸아이와 함께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난 남편이 다시 내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굶겨서 좋겠네.”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으며 내가 대꾸를 했다.
“저런 놈은 굶어도 싸.”
남편이 정말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 뿐더러, 밥은 잘 안 먹지만 배고픈 것은 잠시도 참지 못하는 아이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한 술 떠 넣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남편이 9시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동안 슬그머니 녀석을 타일러보기로 했다.
“은석아! 어서 아빠한테 사과 드리고 밥 먹어.”
그 때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있던 녀석은 묵묵부답이었다.
“상 차려 놓았으니까 빨리 나와. 알았지? 엄마 말 안 들으면 정말 화낼 거야?”
하지만 녀석은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기 예보는 물론 스포츠 뉴스가 끝난 뒤 수목 드라마의 광고가 시작될 때까지도.
내가 다시 녀석의 방으로 들어갔을 땐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래, 배고픈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겪어볼 필요도 있을 거야.’
나는 얼굴이 누렇게 뜬 ‘꽃제비’들이 시궁창 같은 장바닥을 배회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아들을 자리 위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