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큰스님의 열반입니까

광덕 스님 추모 법어

2007-09-24     관리자

반갑습니다. 부처님 인연으로 여러분과 이렇게 자리를 함께한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법문 못하기로 부산에서 첫째갑니다. 제가 법문을 하고나면 국어책 읽느냐 하는 말을 많이들 해요. 그런데 광덕 스님과 인연이 깊어 오래 모시고 살았다고, 그때 일화를 들려주겠느냐고 해서, 뭐 그런 일화야 나 말고도 오랫동안 스님을 모시고 사신 분들이 많지 않느냐 했더니, 그래도 제 나름대로 몇 말씀 해 달라고 해서 나왔으니 큰 기대는 말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사부대중이 모여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계율에 의지하고 살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국법을, 절에서는 48경계를 잘 지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광 도량에 광덕 스님이 계시지 않는 마당에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또 무엇에 의지해서 살 것입니까? 어떠한 것이 스님의 본래의 면목이고 어떠한 것이 스님의 본래 경계입니까? 큰스님의 법음은 가슴 가슴마다 남아 있지만 그 경계, 그 심오한 진리를 여러분이 볼 수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천지보다 먼저여서 그 시초가 없고 천지보다 나중이어서 그 종말이 없을 것이며 위로는 하늘을 뚫고, 아래로는 땅 속을 뚫으며, 밝기는 일월보다 더하고, 검기는 먹보다 더하며, 강하기는 철석과도 같고 연하기는 솜과도 같은 것이 큰스님의 본래 마음입니다. 어떠한 것이 큰스님의 열반입니까? 공한 것도 아닐 것이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만약에 이보다 더 큰 힘을 보았다면 큰스님을 바로 모시고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여도 들인 바 없고 잡혀도 잡힌 바 없으며 공공적적하여 항상 모양이 없으니 참으로 이것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불광 창건 이래로 지금까지 큰스님은 불광을 떠나서 사신 적이 없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큰스님의 마음을 크기로 말하면 하늘 땅을 다 덮었고, 작기로는 바늘귀 하나도 들어갈 곳이 없이 소소한 것까지 세세히 살펴주셨던 큰스님을 생각할진대, 과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 활로를 찾아야 할 줄로 압니다. 다만 이것이 공한 것도 실한 것도 아니라고 큰스님께서 구구절절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꾀꼬리의 읊조림과 제비의 지저귐, 즉 실상이 법이라 하였을 것이고 꽃이 피고 잎이 푸르름은 그것이 바로 여여한 이치가 아니겠느냐고 큰스님은 틀림없이 말씀하셨을 거예요. 지옥이 원래 천당이며 저자거리가 원래로 화장장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신 큰스님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하는 것마다 보는 것마다 다 문수보살의 얼굴 아닌 것이 없고 걸음걸음마다 보현행 아닌 것이 없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께서는 보현행원을 얼마나 많이 읊으셨습니까? 보현행원을 얼마나 갈구했고 보현행원을 의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까? 만리 강산에 비로나자불이 널려 있고 백 가지 풀잎 끝에 관음이 춤을 추니 산마다 들마다 무생무멸을 말하고 꿈마다 입마다 광명을 놓는구나. 평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사람 사람마다 제각각 불성을 갖고 있고 모든 것이 다 반야를 토하는 것일진대, 남으로 가도 북으로 가도 모두가 연화이며 푸른 걸 봐도 붉은 걸 봐도 아미타의 극락세계가 아니겠느냐고, 스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던 것으로 알고 배웠습니다. 그 도리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하고 모양이 없다 해도 허망한 것입니다. 본래가 소소영령해 여래를 보매 본래 내가 이 큰법당이로다. 삼천대천세계를 삼키는 이 마음이 과연 어디로 좇아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큰스님은 한 생애를 두고 여러분들과 대화하셨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를 끌고 바람을 따라 남은 나이를 홀연히 산중에서 보내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보살행을 위해 일신을 버리시고 일체중생을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다가 지금 부처님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부처님 광명의 큰 뜻을 광덕 큰스님께서 수년간 말씀하셨는데 짧은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법문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은 이만큼 해 두고 스님과 함께한 지난 이야기나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범어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기는 했지만 머리 맞대고 살기로는 60년도 뚝섬 봉은사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시절 봉은사는 아주 가난한 절이었지요. 시내에서 간장 된장을 얻어다가 스님하고 저하고 리어카에 싣고 오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 승가평에서 지은 채소들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뚝섬에 나가서 쌀과 연탄으로 바꿔 오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 포교하시고 대불련 연합회 일도 하시고 대학생 구도부도 지도하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께서 대종을 치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큰 종을 쳤지요. 대중이 다 모였는데 스님이 눈물을 흘리셔요. 현재 무역센터가 있는 승가평 땅과 경기고가 있는 땅을 총무원에서 다 팔았다는 거예요. “내가 이 땅을 지키지 못했으니 어떻게 부처님을 바로 보고 살 수 있겠느냐. 우리 걸망 메고 각자 다 흩어지자.” 그 때 대중스님 30여 명이 있었는데 총무원에 가서 항의도 하고 했지만 안 됐어요.
결국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태산이 와서 내 가슴을 친 것 같다”하시며 “나는 이후로 다시는 공사찰에 살지 않을 것이다. 총무원 간부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했더니 선방으로 가거라 해서 그 때 30여 명 대중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 이후 스님께서는 다시는 총무원 일에 개입하지 않으셨고 공사찰 주지를 하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이 없으셨어요.
해인사 성철 스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아우가 누구냐 하면 광덕 스님이셨어요. 광덕 스님이 오시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셨어요. 그런데 한 번은 올라오라고 그래요. 그 때 제가 광덕 스님 시봉을 들던 때인데 함께 해인사 백련암으로 올라갔지요. 성철 스님 말씀이 “광덕아, 너 잘 왔다. 해인사 주지 발령을 내 놨으니까 절을 맡아서 잘 복원해 보도록 해라.” 그런데 광덕 큰스님께서 “저는 해인사 주지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옆에서 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성철 스님께서도 계속 권하시는데도 결국 끝내 사양하고 내려가시더군요. 그래서 ‘우리 사형님 고집이 대단하시구나. 성철 스님 고집도 이기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73~4년 쯤 일인데 범어사에서 총무원장 추대를 하라고 해서 문중회의를 했지요. 총무원장 할 만한 사람은 광덕 스님밖에 없다고 해서 문중의 모든 스님들이 천하없어도 광덕 스님이 이번만은 총무원장을 맡아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극구 사양하시며 안 하신다는 거예요. 문중에서는 문중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여러 말이 오가며 심각했었지요. 그러나 끝내 안 하시고 말았지요.
범어사가 동산 스님 열반하시고 나서 참 어려웠어요. 사중에서 여러 차례 스님께 범어사 주지를 하시라는 말씀이 있었으나 한번도 범어사 주지를 안 하시고, 대신에 일할 만한 사람을 보내 주신다고 해서 저를 범어사 재무로 보내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 덕으로 범어사 재무도 하고, 총무도 하고 주지도 하고 그랬어요.
스님께서는 총무원 간부는 물론 모든 주지직에서 일체 손을 떼시고 “내 생애를 버려 보살행을 해야겠다”고 하시고 불광법회를 이끄셨어요. 그런 원력을 가지신 분이 광덕 스님이십니다. 오직 여러분을 위해 사신 분이 고광덕 큰 스님이십니다. 스님은 온전히 보살이십니다. 지위, 명예, 안락함 다 버리셨어요.
큰스님께서는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어요. 대각사 뒷방에 계실 때였지요. 한 번은 스님 상좌가 울고 있어요. 상좌가 공양주에게 말해서 쇠족을 푹 고아 그 국물로 밥을 했던가 봐요. 그런데 스님께서 그 냄새를 맡고 그걸 마당에 내다버리셨어요. 스님은 멸치 하나도 안 잡수셨지요.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스님 건강하셔야 포교도 하고 마하반야바라밀도 하고 그럴 텐데요.” 하니까 “그거 안 해 먹어도 다 할 수 있어” 그러셔요. 그래서 내가 “어머니 뱃 속에서 일년만 늦게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면 어떻습니까?” 했더니 “아는 소리 하지 마, 건방지게.” 그러시더군요. 말을 못 붙였어요. 그렇게 고집스럽게 율을 지키신 분이 고광덕 스님이에요. 한국에 계맥이 쭉 내려와서 광덕 스님께 이어졌습니다. 계행을 잘 지키는 것은 한국에서 첫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저런 얘기는 하루종일 해도 끝이 없을 테고, 스님께서는 서울 시내를 큰 도량으로 보셨습니다. 큰 가람으로 여기셨어요. 아침에 도량석 하러 나가면 목탁을 치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셨어요. 대각사에서 돈화문, 중앙청, 광화문, 남대문, 명동, 청계천, 종로를 거처 대각사로 들어오시는 것으로 1년을 계속 하셨어요. 그 때 뒤를 따라다니던 거사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경찰들하고 시비가 붙기도 했어요. 왜 남들 자는데 목탁 치고 다니느냐고.
참 열성이셨지요. 스님께서 생활불교 현대불교로 한국불교의 물줄기를 되돌려 놓으신 이후 시내에 얼마나 많은 포교당이 늘어났습니까? 그 때만 해도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도량석 할 때 얼마나 추웠습니까? 그래도 하루도 안 빠지고 하셨어요. 돌아오는데 1시간 20분이나 걸렸어요. 나는 너무 춥고 힘이 들어 염불도 안 하고 따라만 다녔어요.
뚝섬에서 농사 지을 때 호미 들고 밭 매고 모심고 추수까지 하셨는데 그 땅을 지키지 못했다고 가슴 아파 하신 스님. 아무쪼록 부처님 정법대로 사시다가 가신 어른입니다. 한 번은 제가 인도 갔다 오는 길에 염주를 하나 사다 드렸더니 “인도에는 왜 갔다 왔느냐”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나라 부처님 뵈러 갔다 왔습니다.” 했더니 “부처님 요새 뭐 하시드냐?” 하고 물으셔요. 나는 아무 대답도 못했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큰스님을 다시는 뵈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빛을 잃은 것같이 가슴이 막막합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자,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스님께서 다시 빛으로 돌아오시기를 기도합시다.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