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독교가 맹위를 떨치는가?

2003-12-29     관리자



거의 2000 여 년을 지배하였던 기독 사상이 서구에서는 힘을 잃어 가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기독교 전파가 단 기간에 위력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도 드물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다른 나라의 기독교화를 위한 선교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NGO단체로 위장한 선교사들이 중국과 몽골을 비롯한 동남아 곳곳에 파견되어 놀라울 정도로 그 곳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렇게 기독교가 융성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은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근세의 선지식이신 백 성욱 박사님께서는 이런 법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엄을 공부한 분들이 다음 생에 기독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책에서 보고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불교 사상의 최정수인 화엄 사상을 공부한 분들이 어떻게 다음 생에 믿음이 주된 수행인 그런 종교를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화엄은 그야말로 온 우주의 진리가 들어 가 있는 가르침인데, 그런 가르침을 접한 분들이 아무리 생이 바뀌었다지만 어쩌면 맹목적일지 모르는 믿음의 종교로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엄을 공부하면서 그 의문이 풀려 가는 것 같습니다.


화엄의 수행 체계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단계로 정리됩니다. 물론 화엄경 자체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뛰어난 선지식들에 의해 방대한 화엄의 수행 체계는 그렇게 정리되었고, 이런 수행 체계는 곧 모든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그 중에서도 유독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다른 어떤 경에서보다 많이 설해집니다. 경 곳곳에서 믿음의 중요성이 강조될 뿐 아니라 화엄경 자체가 "여기에 의심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愼勿於此懷疑念)"하는 게송으로 끝납니다. 화엄경의 핵심 사상이 요약, 정리되어 있는 보현행원품도 "의심을 갖지 말라(聞此願王 莫生疑念)"는 말로 끝납니다.


우리 불자들은 수행에 있어 믿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불교 사상의 최정수라는 화엄에서는 믿음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初發心時 便成正覺) 말합니다. 그만큼 수행에 있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수행과 믿음과의 관계는 언젠가 다음에 기회 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따라서 화엄 수행을 제대로 한 분이라면 믿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보현행원 사상을 다시 일으키신 불광의 광덕 큰스님의 법음이 언제나 확신과 믿음에 차 있으셨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큰스님께서 젊은 날 종로 봉익동 대각사에서 노천 법당을 여셨을 때, 큰스님의 법문을 처음 들으신 분들 중에는 큰스님의 설법이 선사(禪師)가 아니라 '꼭 목사가 설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분이 적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본래 화엄 불교의 나라입니다. 비록 조선 시대 이후 억불 정책으로 선종으로 돌아선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고려 시대까지 우리나라 불교는 원통 불교, 곧 화엄 불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화엄의 사상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이 되고 연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몸을 받는 분들 역시, 알게 모르게 불교 인연을 가지신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중생은 인연 따라 태어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 태어날 인연을 지은 분은 우리나라에, 미국이나 유럽, 또는 중국이나 일본에 태어날 인연을 지은 분은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됩니다.
(일타 큰스님은 미국에 태어나는 인연을 짓기 위해 굳이 아픈 몸을 이끄시고 하와이에서 열반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니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되는 말들이 우리는 쉽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가령 '소매 끝만 스쳐도 인연이다', '마음이 중요하다'라는 말은 서구인들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말은 쉽게 이해하고 또 동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화엄이 꽃피던 나라에 믿음의 종교가 번성하는 것은 과히 틀린 일은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국민들은 쉽게 믿음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인연의 오묘한 이치를 모르고 어떻게 이 땅에 오게 되었으며 어떤 연유로 지금의 내가 되었으며 어떤 인연으로 지금의 종교를 만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하여 금생에 만난 믿음의 종교를 나의 모두로 알며, 그 종교를 모든 종교의 끝으로 생각하여 마침내 남에게 곧잘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현실이 가슴 아픈 것입니다. 화엄에서 설하는 믿음이란 맹신(盲信)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에 이어지는, 어디까지나 지혜가 동반된 '밝음의 믿음'인데 말입니다. 믿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믿음이며 또한 깨달음으로 '가야만' 하는 믿음입니다.


지금 강한 믿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분들 대다수가 밝은 눈으로 보면 모두 과거 생에 불자님들입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내 종교를 믿지 않는 분을 아쉬워하고 심지어 원망하기까지 하여 평화롭던 집안에, 사회에 먹구름을 몰고 옵니다. (카톨릭이 개신교보다 이런 면이 덜한 것은 종교의 차이에서라기보다 카톨릭의 불교화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카톨릭은 전형적인 로마 교황청의 카톨릭이 아니라 '한국화,불교화 된 카톨릭'입니다.)


저의 이런 말씀은 저의 글을 읽으시는 타종교인들 분께 결례가 될지 모르나, 그런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타까운 마음'에서입니다. 자신의 인연을 모르면서 수천 년을 이어 온 배달 겨레의 인연을 너무나 강하게 무너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나라 전통까지 부정하는 업을 이 나라의 선량한 기독인들이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한다는 착각 아래 닫힌 생각으로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며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교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많은 어둠과 아쉬움이 곳곳에 짙게 배어있습니다.
저는 불법의 정수인 화엄의 나라, 화엄의 인연을 지은 이 땅에 오신 많은 분들이, 믿음이 끝이 아닌 그런 믿음, 그리고 진정 지혜로운 믿음의 인연을 일으켜, 더 많은 분들에게 참으로 밝은 소식을 전하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번성하는 그런 이웃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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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