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18.우주의 중심, 수미산 4

수미산 순례기18

2007-09-24     김규현

‘산-돌이’ 의식, ‘코라(Kora)’

성스러운 산을 한 바퀴 도는 순례 행위는 ‘코라’라고 하여 옛부터 힌두교를 비롯한 4대 종교에서 신성한 의식으로 인식되어 내려왔다. 불교 또한 예외일 수 없어서 이번 생에서의 업(業 Karma)을 정화하는 방법론으로 권장되어 한 번의 코라는 이생에서의 업을 소멸시킬 수 있고 세번의 코라는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생기게 되었다.

넨리곰파 밑에서 우리는 야크똥을 연료로 차를 끊여 간단한 점심을 떼우고 다시 일단의 원주민들에 섞여 길을 재촉하였다.

‘수미산설’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오르고 있는 서쪽 계곡은 수미산(須彌山)의 수문장인 사천왕 중에서도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지키고 있는 곳에 해당된다. 그런 선입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산 기슭에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가 천왕의 큰눈처럼 여겨져 불·보살의 경계를 넘으려는 버릇없는 중생들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해동의 순례자도 티벳인처럼 육자명왕진언‘옴 마니 파드메 훔’을 웅얼거리며 이번 코라의 탈 없음을 기원해본다.

신의 냇물 라추를 따라 얼마를 오르니 오른쪽으로 거대한 붉은 바위가 하늘 가득 솟아 있다. 힌두교 교리체계에서의 창조와 파괴의, 신 쉬바(Shava)를 상징하는 삼지창 모양의 마하칼라 봉(Maha Kala峰)이다. 힌두인들에게 쉬바신은 죽음의 두려움 그 자체이자 또한 삶의 열쇠를 가진 초월적 존재로서 출가수행자의 수호신으로, 순례자의 길벗으로, 때로는 요가행자(Yoga)의 모습으로 인간세상에 나타난다. 또 그는 사원 안에서는 ‘링가(Linga,男根)’형태로 안치되어 힌두교도들의 숭배를 받는데, 이는 창조의 원리와 다산의 의미이기도 한다.

쉬바 신화에 의하면 그의 신전은 바로 이 카이라스 산의 수정 봉우리 위이다. 그는 때때로 산을 내려와 조용한 산기슭이나 마나사로바 호수가에 앉아 조용히 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면 때문에 그는 티벳의 실존 인물인 밀라레빠와 동일시되어 많은 설화에서 혼동되어 묘사되기도 한다.

다시 계곡을 얼마쯤 오르면 대협곡이 나타난다. 왼쪽의 건너편에는 타라·아미타·비자야 봉 등이 차례로 솟아 있고 고개를 들어 오른편을 치켜다 보면 그 유명한 파드마삼바바의‘토마 봉(Torma峰)’이, 그 위로는 수미산의 수정 봉우리가 하늘을 거의 가린 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이 지점은 바로 이 성스러운 산의 산밑, 겨드랑이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바로 눈 앞에 2천m나 되는 단일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국이어서 허리와 고개를 완전히 젖히지 않으면 정상 부분을 바라다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산에서 만날 수 있는 티벳 역사상 걸출한 인물 중의 하나는-밀라레빠와 쌍벽을 이룰 수 있는- 파드마삼바바이다. 구루림포체 또는 연화생(蓮華生)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신비스런 밀교성자는 티벳에 불교를 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이름이나 생몰년대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단지‘연꽃 속에서 태어난 자’라고만 불리워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천 2백년 전 티벳의 토번 왕조 38대 티송데첸(Trisong Desten 755-796) 왕의 초청으로 이곳에 와 불교를 전하고 최초의 사원 삼예사를 창건하였지만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은 것을 간파하고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게 된다. 마치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 대사와 같은 궤도를 겪게 된다.

파드마는 동굴 속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는 이 책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여러 동굴 속에 감추어 놓고는, 때가 되면 그가 지정한 그의 환생인들이 찾아 내어, 세상에 내놓게 안배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삶과 죽음을 연결한 ‘보물찾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찾아낸 책 중의 하나가 유명한 『티벳 사자의 서』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전생에 스승에게 받은 유촉을 잊지 않고 이생에서 기억해 내고는 어둠의 동굴 속에서 스승의 책을 찾아내는 제자들의 모습을…….

얼마나 신비스러운 광경인가!

그 역사적인 동굴들의 하나가 지금 이 해동의 나그네 눈 앞 어디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밀라레빠, 이런 곳에서 어찌 한 수 읊지 않았으리.

“붉은 바위(토마 바위)는 명성이 드높아 세상 사람들이 멀리서 칭송하네. ‘거대한 바위는 보석을 쌓아 놓은 것 같도다!’가까이 다가가 보면 평원에 우뚝 솟은 장엄한 바위 봉우리.…”

지구상 최고(해발 5.210m)의 사원에서 하루밤을…

파드마와의 접속삼매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음영이 유난히 짙은 산그늘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떨어지는 해에 쫓겨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서두른 탓에 다행히 어둡기 전에 길을 잃지 않고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숙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디라북(Drira puk, G) 사원 마당에는 순례단들이 피워놓은 모닥불들이 여러 곳에서 타고 있었는데 그 연기는 멀리에서도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에베레스트 산 밑의 롱푸 사원보다도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이 사원은, 토굴 수준이지만, 13세기 카규파 종파에 의해 수행처로 창건되어 순례자의 숙박지로서 이용되어 내려왔다. 디라북의 의미는 암야크의 뿔의 동굴이란 뜻으로 동굴 천장에 야크뿔 자국이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헛간 같은 방 두 채는 이미 인도팀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노숙을 하여야만 했으므로 하늘만 겨우 가리는 텐트를 빌려 숙소를 마련하고는 저녁 준비에 부산하였다. 우리 팀에서 쌀이 주식인 사람은 나와 일본 친구뿐이어서, 끓는 물을 얻어 알파인쌀 봉지에 부어 꿀꿀이밥을 만들어, 간단한 반찬을 곁들인 지구상 최고의 사원에서의 저녁식사는 그런 대로 괜찮은 성찬이었다.

티벳차를 마시고, 모닥불가에서 노닥거리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우모침낭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와 텐트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밤하늘의 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달도 없는 그뭄이었지만 하늘은 별의 들판 그 자체였다. 오색영롱한 별들이 뿌려져 있는 별의 벌판이었다. 그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영겁의 시간과 광대한 우주 속에서의 초개 같은 우리들의 인생살이가 무상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이렇게 삶도 죽음도 아닌 것이 남아 있는데…….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는데 주위의 술렁거림에 잠에서 깨어 산정 있는 쪽을 바라보니 눈부시게 빛나는 성산의 봉우리가 구름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지구별의 중심 안테나로서 영원한 우주와 교신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저절로 다문 입술 사이로‘옴’이란 진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은 맑고 햇살은 찬란하였다. 한참의 부산스러움 끝에 출발 준비를 끝내고 혼자 시냇가로 내려왔다. 될마라후라는 이름의 맑은 시내였는데, 이곳에서 이 물은 남북으로 갈라져 한쪽은 인더스로, 다른쪽은 갠지스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바로 갠지스와 인더스의 발원지가 되는 것이다.

해동의 나그네는, 황하와 양자강의 발원지에서처럼, 연꽃초를 꺼내 불을 붙여 가만히 물 위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내, 너를 따라 흘러 바다에 이르리라. 갠지스면 어떻고 인더스면 어떠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