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 큰스님

2003-12-08     관리자




한 분의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올해에는 왜 이리 제방의 큰스님들이 앞다투어(?) 열반에 드시는지,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성자필멸(盛者必滅)이라 하지만, 그리고 본래 오고감이 없는 것이라 하지만 한 해를 채 한 달도 못 남긴 12 월에 또 들려온 큰스님의 열반 소식은 더 이상의 말문을 막히게 합니다. 청화 큰스님 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한 분의 큰스님이 열반에 드시는지... 정말 세월도 무정한가 봅니다.


월하 큰스님을 뵈온 것은 풋내기 대학 일학년 겨울, 처음 간 통도사 수련회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도반들과 완행 열차를 타고 부산에 이르러, 푸른 마음으로 양산에서 십 리 길을 걸어 들어 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 간 통도사는 어린 저의 눈에 제가 흔히 보던 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여행 삼아 들렀던 절들은 대부분 단청이 휘황찬란하였는데, 통도사는 단청이라고는 볼 수 없는, 오직 고색찬란한 절이었던 것입니다. 신심(?)이라곤 전혀 없던 때라 절이라면 으레 울긋불긋한 줄 알았었는데 옛 모습 그대로인 통도사를 참 이상한 절이라고 생각한 것도 기억납니다.



그저 경치 좋은 절간에서 맛있는 절밥 먹고 풍경 소리 들으며 언제든 잠 오면 졸 수 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계산 아래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던 통도사 수련회는, 그러나 철모르던 애숭이 대학생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수련회라곤 처음 간 시절, 하루 8 시간이 넘는 참선과 익숙하지 않던 발우 공양. 그 때만 해도 살을 에인다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예불을 드리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러 가던 그 차디찬 얼음 잔뜩 낀 계곡 물. 그리고 일체의 말을 못하게 하고 눕지도 말도 못하게 하며 엄숙한 모습으로 저희에게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 주던 스님들은 저를 조금은 숨막히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보내던 어느 날, 큰스님 친견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오신 분이 월하 큰스님이었습니다. 며칠을 되지도 않는 화두를 든다고 틈만 나면 끄떡끄떡 졸던 눈 너머로, 인자한 할아버지 한 분이 자비로운 미소를 띠며 오셨던 것입니다.


큰스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피곤에 졸던 저희에게 아무 꾸지람도 없이 마치 할아버지가 철부지 어린 손자들을 대하듯 한 편으론 자애롭고 한 편으론 대견한 듯 저희들을 보시던, 무척이나 온화하고 자비롭던 큰스님의 모습은 그동안 지쳐가던 저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렇게 통도사에서 이름 없는(?) 노승으로 뵈온 큰스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보통 분이 아니셨습니다. 서슬 푸르던 5 공 시절, 나름대로 제방에 이름을 떨치던 스님들이 모두 새로운 정권 하에 별 말씀을 못 드리던 그 때에, 불법에 어긋나는 일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맞서시는 모습은 저로 하여금 일제 하의 만해 스님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당신에게는 엄격하시면서도 중생들에게는 늘 자비로우시던 큰스님. 종정에 계실 때 원칙을 지키시다 반대파로부터 불신임도 당하시며 그 보복으로 통도사가 총림 자격마저 박탈당하셨을 때, 아무리 수행 깊으신 큰스님이셨지만 그 심정이 어떠하셨을까요...


그동안 다른 분들은 무슨 정법을 무얼 그렇게 잘 지키는지 몰라도, 무슨 초법적 승려 대회는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리고 그런 와중에 종정이라는 승가의 최고 어른을 내쫓는 것을 어찌 그렇게 쉽게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가 시작될 때 많은 분들이 올 한 해를 걱정하였습니다. 어두운 기운이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덮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다소 간의 사건들은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나라나 세계적으로나 그다지 큰 일은 없이 한해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선지식들은 자비로써 이 세상에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어둡고 막막할 때 버팀목으로서, 또는 등불로서 중생들 앞에 현현하십니다. 그리하여 어린 중생들은 선지식들의 그 밝은 모습에 희망을 얻고 길을 찾으며 어둠을 헤쳐나갑니다.


올해에는 유난히 큰스님들의 열반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해에 열반에 드신 큰스님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자비로운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올초에 열반에 드신 서암 큰스님, 올 가을의 청화 큰스님, 그리고 월하 큰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두 한 경계를 이루신 것뿐만 아니라 자비롭기 이를 데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 사실로 볼 때 올해를 뒤덮던 어두운 기운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운 기운이 아직도 위력적이라면 자비로운 큰스님들이 가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급한 고비는 넘겼기에 큰스님들이 당신의 인연을 거두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눈물도 메마른 듯, 그저 초겨울에 찾아 온 추위가 매섭기만 합니다.
잎새들 다 떨어진 황량한 겨울의 창 밖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생사사대(生死事大) 무상신속(無常迅速) 촌음가석(寸陰可惜, 촌음을 아까워 함), 신물방일(愼勿放逸,게으르지 않음)
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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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시아본사아미타불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