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의 횃불이셨던 스님의 뜻을 올곧게 이으오리다.

빛의 목소리

2007-09-24     관리자


광덕 큰스님의 열반 소식이 알려지자 교계 내외의 일만오천 여 분향객이 부산 범어사 보제루와 서울 불광사 보광당에 마련된 분향소에 분향하고 스님의 열반을 애도했다. 용성 선사와 동산 선사의 선맥을 계승하신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자 한국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의 횃불이셨던 광덕 큰스님의 열반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들, 그 생전의 뜻을 기리는 마음들로 충만한 목소리를 허공으로 흘려보낼 수 없어 지면에 풀어 큰스님가시는 길에 바친다.

“근래에 광덕 스님만한 이가 없어요. 수행과 계율에 철저할 뿐만 아니라 설법도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종무행정 능력도 아주 탁월했지요. 내가 총무원장 할 때 총무부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광덕 스님이 일처리를 잘 해서 아주 수월하게 총무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불광지 창간호부터 애독자인데 광덕 스님의 설법을 보면서 감탄하곤 했어요. 지견이 열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 범어사로 문병을 갔을 때 수행한 이야기를 주욱 하는 것을 보고 득력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지요.
종단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참으로 아까운 선지식을 잃어 안타깝기는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제 남은 사람의 몫은 광덕 스님의 뜻을 올곧게 이어나가는 것뿐입니다.
석주 스님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칠보사 조실)

“광덕 스님은 중생 교화하는 데만 뜻을 두고 일생을 제자 교육, 신도 포교에만 힘을 쓰신 분입니다. 불광회를 통해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교육시키셨고, 광덕 스님이 창간한 불광지는 종교 잡지 중에서 최고로 수준이 높아요. 범어사에서 같은 스승을 모시고 수행했고, 내가 조계사 주지할 때 광덕 스님이 조계종 총무부장을 하셨지요.
사형사제간으로 서로 많이 돕고 하던 처지인데 이제 뵐 수 없으니 허전한 마음이야 표현할 길이 있겠어요.
고산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광덕 스님은 출가했을 적부터 신심 깊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많이들 칭송했지요. 많은 책을 썼는데, 하루 저녁 앉아서 생각하면 하나씩 쑥쑥 써내는 것을 보고 참 비상한 사람이라고들 했지요.
태어날 적부터 허약하게 태어난 이라 출가해서 용맹정진하지 않았으면 벌써 40년 전에 돌아갔을 사람입니다. 매번 죽을 고비에 들었다가도 정진으로써 그걸 다 넘기는 것을 보고 참 장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몸 가지고 칠십이 넘도록 살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으니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근래 불교를 중흥시킨 선지식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도성 스님(부산 태종사 회주)

“광덕 스님께서 한국불교계에 공헌한 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말을 아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우리 불교계에 큰 획을 긋고 가신 분입니다. 큰별이 떨어진 것 같아서 너무 허전하고 섭섭하고….
서울 장안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부처님 법을 환하게 펼치신 광덕 스님은 광(光)자 덕(德)자 이름 그대로, 도덕으로 일신을 닦고 그 빛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신 선각자십니다.”
명성 스님(운문승가대학 학장)

“1979년, 도심포교를 하기 위해 삼선포교원을 개원했을 때 제일 먼저 오셔서 격려를 해주시던 큰스님의 그 환한 옥안과 단아하신 위의에 허름한 셋방 법당이 환해지던 모습은 20년간 저와 대중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지요. 1980년도 은석초등학교 어린이법회 창립 때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잘 뛰어놀기를 당부하시던 천진무구한 모습, 또 구치소에서 뵙던 모습은 지장보살님이셨습니다. 늘 존경하는 스님을 닮으려 노력했는데, 이제 뵙고 싶어도 뵐 수 없게 된 지금 무슨 말로 이 슬픔을 표현하겠습니까?”
지광 스님(서울 삼선포교원 주지)

“큰스님이 조계종 총무부장 하실 때 내가 감찰국장을 했어요. 그 때 스님께 ‘무엇부터 할까요?’ 물었더니 어린이 사업부터 하라고 하셔서 어린이 포교를 했지요. 광덕 큰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의 물꼬를 트신 것입니다. 한국불교 전체, 더 나아가 세상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신 분입니다.
해방 이후 척박한 한국불교를 개간하고 씨 뿌리신 광덕 큰스님께서 만들어 놓은 그 토양에서 앞으로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올 것입니다.”
지환 스님(함양 보림사 주지)

“큰스님께서 대각회 이사장을 맡으시면서 많은 사찰들이 대각회 산하로 들어오게 되었고, 큰스님께서 10년 동안의 숙원사업이었던 대각사상 연구원 건물을 매입해서 개원하게 해주시는 등 대각회의 여러 사업을 적극적으로 주관하셨습니다. 또한 동국대학에서 추진하고 있는 불교종합병원 건립불사에 거금 2억을 희사해 주심으로 해서 불사가 불붙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열반으로 한국불교뿐만 아니라 대각회도 주인을 잃고 어디로 갈지 모르고 있으나 평소 스님의 뜻을 거울삼아 대각회도 잘 이끌어 가고 불교종합병원도 잘 건설해 나가겠습니다.
보광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불교에 귀의해서 광덕 스님 같은 스승을 만난 것이 너무 감사해요. 마하반야바라밀이 불교의 기본정신이라는 걸, 처음 염송할 때는 잘 몰랐는데, 불교공부를 하면서 세월이 가니까 그것이 중요한 핵심인 것을 알겠더군요.
스님께선 법회요전을 쓰실 때 제가 건의 드리는 내용으로 고쳐 주시기도 하시고, 제가 언어학을 전공한 관계로 글로써 남다른 교류가 있었어요. 아마 스님께서 불광법회와 같은 운동을 안 하셨으면 한국불교는 아직 전근대적인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었을 거예요. 좀더 살아계셨으면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더 큰 공헌을 하셨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br>이남덕(이화여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스님께선 무엇보다도 불교의 밝고 환희로운 이미지를 새롭게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스님의 맑고 청정한 모습을 뵙고 ‘이렇게 청아하고 아름다운 스님이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아무튼 스님의 힘찬 법문을 듣다보면 신심이 절로 나서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스님 법문을 들으러 많이 오셨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절은 비구와 대처가 맨날 싸움만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던 때여서 절에 간다는 것이 창피해서 몰래 숨어서 갔는데, 광덕 스님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확 모여들었다가 스님이 가시면 사람들이 확 헤어지고 그랬어요. 한국 불교 정화 이후에 불교 이미지를 쇄신하셨고, 전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신 스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서 모두가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영자(동국대 불교대학원장)

“65년도 봉은사 대학생 수도원 시절부터 큰스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열반 소식을 듣고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아득함, 제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 때의 그 심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큰스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학들이 잘 해 나가야 할텐데’하는 근심걱정이 들더군요.
광덕 큰스님은 실로 태양 같은 분이셨습니다. 큰스님께선 늘 우리 모든 사람 개개인이 부처요, 광명이라고 역설하셨지요. 한국불교사상 큰스님처럼 우리 인생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인 삶을 일러 주신 분도 없습니다.
큰스님의 덕화로 더 많은 원력과 뜻을 가진 스님들이 배출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저 또한 불교발전에 보탬이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이용부(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임이사)

범어사 보제루에 모셔진 스님 영정에 분향을 올리면서 25년 전 스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수계법문을 해주신 것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습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나아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라’는 스님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법문은 당시 우리 젊은 불자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70년대 우리 사회는 혼돈의 시대였고, 대학가에는 데모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렇듯 어두운 질곡의 시절 스님을 처음 뵈었는데 스님께서는 항상 ‘밝은 횃불을 들면 어둠은 자연적 없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지요.
불교와 스님과 일반 불자들의 벽을 허물고 많은 대중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한 큰스님의 그 맑고 밝은 미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큰스님께서 부처님 법을 널리 펴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현진이라는 법명이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정진할 것입니다.”
박흥우(창원 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제 인생을 바꾸어주셨지요. 젊었을 때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했었는데 군대에 가서 종교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고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할 때 광덕 큰스님을 뵙게 되었고 마음을 잡았습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혜월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시면서 ‘달이 온 누리에 비치듯이 불교음악을 평생의 불사로 생각하고 불교음악으로 전법을 하라’고 간곡히 부촉하셨지요.
20년 전 스님의 뜻을 받들어 처음 창단된 불광바라밀다 합창단을 지휘하고, 그 후 마하보디 합창단을 창단해서 지도하는 것을 인연으로 해서 불교음악이 제 평생의 업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덕화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비록 스님의 육신은 가셨어도 늘 스님의 향기를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더욱 더 용맹정진하여 불교음악의 발전에 힘쓰는 것이야말로 스님의 은혜를 만분지 일이나마 갚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완(경주 동국대 국악학과 교수)

“20년 전 제가 해군 보국사 군법당(광덕 큰스님께서 불상을 봉안하신 곳)의 군법사로 있을 때 처음 뵈었는데, 큰스님께선 군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주셨지요. 열반하시기 한 달 전 쯤 찾아뵈었을 때 ‘이제 껍데기 불교 하면 안 된다. 알맹이 불교 해야 한다’시던 그 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앞 뒤 인사도 안 받으시고 힘겹게 하시던 그 말씀이 화두가 되었는데 이제 열반에 드셨으니 어떻게 점검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씨를 뿌리신 알맹이 불교, 정법을 구현할 것을 서원합니다.”
장익(위덕대 불교학과 교수)

“범어사 신도들은 광덕 스님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생각하고 마음속 깊이 존경했어요. 스님께서 법문을 설하실 때 보면, 부처님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나셨어요. 작년 여름에 범어사에 오셨을 때, 친견한 것이 마지막이 되버렸습니다. 제가 중앙승가대 불사에 동참했던 것을 기억하시고, 불교발전을 위해 더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스님은 혜(慧)가 워낙 맑으셔서 기억력이 좋으셨지요. 말년에도 신도들의 불명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큰 스승을 잃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스님의 뜻대로 불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각화성(범어사 신도)

“제가 대학생 불교연합회 일을 맡고 있을 때, 스님을 모시고 소림사에서 매주 법회를 보았는데 성황이었지요. 스님께서 해양대학교 불교학생회에 매주 법문을 나가셔서 해양대생 3분의 1을 불교신도로 만드셨던 일, 건강이 안 좋으신데도 ‘법문하다가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법상에 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불광지를 만들어 문서 포교를 개척하신 점, 중생의 밝은 심성을 개발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점 등 스님의 크신 업적은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큰스님의 뜻을 기려서 이 나라 불교가 더욱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광덕 스님의 법화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미력을 다해서 전법 교화에 전력할 생각입니다.”
현익채(부산 금정중학교 교사)

“생전에 큰스님을 뵌 적은 없었지만 제 가슴 속에 부처님처럼 살아 숨쉬는 분이셨어요. 「행복의 법칙」,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 등 큰스님께서 집필하신 책을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광덕 큰스님의 그 밝고 환한 희망의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저는 인생의 희망을 가지고 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어요. 큰스님을 꼭 찾아 뵙고 싶었는데… 앞으로도 큰스님께서 쓰신 책 속의 주옥 같은 생생한 법문을 의지하며 힘차게 살것입니다.”
이유미(부산 금정구 거주)

“큰스님께서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하신 삼장법사로서 우리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신 이 시대의 횃불이셨습니다.
보현 보살의 십종행원을 평생 실천하신 대선지식인 스님께서는 가신 것이 아니라 보현 보살의 또다른 화현으로 우리 불광 형제들 곁에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스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반야사상을 널리 선양하고 행하는 것만이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혁위 (불광법회 사회자, 수광산업 전무이사)

“큰스님께선 빛으로 오셨다 빛으로 가신 분이에요. 빛으로 또 오실 거라고 믿어요. 큰스님은 제게 부처님처럼 다가오셨습니다. 부처님과 불자들을 이어주기 위해 부처님의 화현으로 속세에 오셨다 가셨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나요. 스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는데… 앞으로 스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지주로 삼고 살 것을 영전에 약속드렸습니다.”
송윤미(성균관대 중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