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 20송

유식삼십송 강의14

2007-09-23     관리자


제19송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業)의 습기(習氣)와 능(能)과 소(所) 2취(二取)의 습기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생사윤회가 존재하고’ 전이숙(前異熟)이 이미 다하면 다시 다른 이숙(異熟)이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해설
제업습기(諸業習氣)란 업(業)을 지을 수 있는 습기로서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는 습관적 기운이다. 이러한 습기에는 스스로 짓는 능(能)과 상대적으로 따라서 짓는 소(所)의 기운이 항상 구비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생사(生死)가 있고 전후(前後)의 업식(業識)이 반복해서 생멸(生滅)하므로 윤회가 있게 된다.
제업(諸業)은 선·악·무기(善惡無記) 등의 업과 신·구·의(身口意)의 업과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을 총칭하여 제업(諸業)이라 하고 습기(習氣)는 업의 기(氣)가 아뢰야의 장식(藏識)을 훈습하여 같은 업의 공능(功能)을 남기는데 이러한 공능(功能)을 습기(習氣)라 한다.
습기가 장식(藏識) 중에 머무르면 종자라 하고, 그 종자가 성숙하면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게 되어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제업습기(諸業習氣)를 크게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중에 유루업의 습기는 선·악·무기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생사의 인(因)이 된다.
2취(二取)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다. 취(取)는 취착(取着)의 뜻으로 탐착(貪着)으로 이해하면 된다. 능취(能取)는 일체의 심(心)과 심소(心所)의 체(體)이며 소취(所取)는 취(取)할 대상이니 이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라 한다. 여기에서 견분(見分)을 취하는 것은 아집(我執)이라 하고 상분(相分)을 취하는 것은 법집(法執)이라 한다.
2취(二取)는 모두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실아(實我)로 여기고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실법(實法)으로 여기는 것이 확고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아 시간이 오래되면 일종의 습기가 된다. 생사윤회는 모든 습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모든 습기에는 3종이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니 이에 명칭(名稱)과 언설(言說)로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언(言)·어(語)·장구(章句)·부호(符號) 등을 표의명언(表意名言)이라 하고 경계를 요별하기 위해 묘술형언(描述形言)한 것은 현경명언(顯境名言)이라 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니 아(我)란 본래 존재함이 없으나 집착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집(我執)에는 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이 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은 본능적이고 선천적인 것을 말하고 분별아집(分別我執)은 분별에 의해 일어나거나 학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습염적(習染的)이고 후천적이다. 이 두 가지의 아집은 6·7식에 모두 존재하고 그 근원은 7식 중 4번뇌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말나식은 아집의 근본이며 아집은 생사의 근본이다.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니 유지(有支)는 12유지며 12인연이다.
3계(三界)를 3유(三有)라 하는 것은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고 생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지습기는 업습기(業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로서 3계(三界)에서 과(果)를 받게 하는 업종자(業種子)를 불러 일으켜 감득(感得)한다. 여기에 2종이 있으니 즐거움을 불러 일으키는 선업(善業)과 괴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악업(惡業)이 그것이다.
본 송문(頌文)의 제업식(諸業識)은 곧 생사윤회의 근원이며 생사윤회의 주체이며 만법의 주처(主處)이다. 마음의 주처(主處)와 소처(所處), 그리고 그 작용을 아는 것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20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갖가지 계산하는 마음으로 갖가지 사물을 계산하나니 이 계산하는 마음과 계산해서 집착하는 사물의 자성(自性)은 본시 있는 곳이 없다.


해설
제20송부터 24송까지는 3성(三性)·3무성(三無性)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3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이며 일체법이 3성을 떠나지 않지만 이 3성은 본래 무성(無性)이다. 본 송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해설한 송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계교하여 집착한다는 뜻으로 변계(遍計)는 마음으로 우주만물(宇宙萬物)에 대하여 갖가지로 주변계탁(周遍計度)한다는 뜻으로 주변계탁(周遍計度)은 두루 계산하여 헤아린다는 말이다.
소집(所執)은 두루 계산하고 계탁하여 변계(遍計)한 후에 가상해서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생기(生起)된 사물(事物)을 사량분별(思量分別)한 후에 그 명(名)을 집착하거나 그 상(相)을 집착하여 그것들이 유(有)이다, 무(無)이다, 또는 색(色)이다, 심(心)이다, 내지는 실아(實我)이다, 실법(實法)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계량(計量)하여 집착하는 견해(見解)는 실법(實法)이 아니고 오직 환상(幻像)일 뿐이기 때문에 이를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라 이름한 것이다.
피피(彼彼) 두 자의 뜻은 변계(遍計)하는 심념(心念)이 매우 많아 일체만법(一切萬法)에 대하여 두루 계량(計量)함을 형용한 뜻이다.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고 한 제2구의 뜻은 갖가지 사물을 변계(遍計)한다는 뜻으로 마치 바닷물을 잔으로 계량한다면 끝내 계산할 수 없듯이 사물을 계산만 할 뿐 바로 볼 수 없음을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 한다.
따라서 목전(目前)의 경물(景物)을 잘못 판단하여 인(因)이 아닌데 인(因)이라 하고, 과(果)가 아닌데 과(果)라 하고, 시(是)를 비(非)라 하고 비(非)를 시(是)라 하거나, 화(禍)를 복(福)으로 여기고 복(福)을 화(禍)로 여기거나,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잘못 가리는 등 본래의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함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 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고 한 3구의 뜻은 변계(遍計)에는 능변계(能遍計)와 소변계(所遍計)가 있으니 능변계(能遍計)는 마음으로 바깥 사물을 대하는 것으로 주관(主觀)에 속하고, 소변계(所遍計)는 모든 사물을 말한 것으로 객관(客觀)에 속한다.이 양방의 능·소(能所)가 대대(對待)함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에 소집(所執)이 더해지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어 순수하게 대대(對待)하지 못한다.
계탁(計度)한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을 때 이를 집(執)이라 하는데 계집(計執)이란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여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실상(實相)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노끈이 본래 노끈이 아니고 뱀이 본래 뱀이 아니다.
따라서 노끈을 노끈으로 보고 뱀을 뱀으로 본다 해도 이는 실상법(實相法)이 아니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거늘 하물며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는 우(愚)를 범하랴.
본 송 말구(末句)에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은 제8식과 전5식은 능·소(能所)의 변계(遍計)가 없어서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이다.자성(自性)이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능·소(能所)가 없고 능·소(能所)가 없기 때문에 변계(遍計)가 없고 변계(遍計)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