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하나-아름다운 지구(3)-

이남덕 칼럼

2007-09-23     관리자

“일본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 한국에서 온 이남덕입니다."
내가 난 것은 1920년,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기간이 1910년에서 ’45년까지이니 나의 전 학교교육기간을 일본 통치하에서 보낸 셈입니다. 내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교육의 목적과 동기에 있습니다.
나의 최초의 관심은 조선어의 기원을 알고 싶다, 자기 문화, 자기 민족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4, 5년 전의 나의 희망이었던 것이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학에 들어가보니 상급생도 없고 동급생도 없고 조선어문학 전공자는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나는 가택수색(家宅搜索)을 당하고 책들은 압수(押收)당하고 경찰에 호출당했습니다. 내가 왜 외톨이 학생이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지요.
그러나 나는 순수하게 우리 문화를, 민족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염원이 왜 범죄행위에 해당하는가 반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범죄사항이라면 그러한 전공과목을 경성(京城)제국대학에 두어 학생으로 하여금 왜 응모(應募)케 했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형사는 “자신은 국립대학 학과의 존폐문제에 언급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으로 해서 나는 행동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신앙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 언어학 연구에 종사하면서 느낀 것은 ‘관계’의 뜻입니다. 모든 사물은 관계 속에 있습니다. 내가 처음은 한국어의 기원(起源)을 찾으려고 알타이(Altai) 제어 사이의 비교연구를 공부했습니다만 현직을 물러나기 직전 몇 해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에 대해서 힘을 기울였습니다.
두 언어 사이의 비교연구를 시작했을 당시 내가 아주 놀란 것은 이 방면의 연구가 매우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내외(內外)의 언어학자들은 특히 일본측 학자들은 이 관계를 정당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언어의 근간(根幹)인 음운(音韻)과 문법체계(文法體系)의 일치가 이미 인정되어 있는 일본어·한국어·알타이계 언어들 사이의 비교는 연구의 주류에서 밀려나 버리고 일본어 형성 이전의 저층(低層) 언어의 가설에만 경도한 나머지, 몇 개 되지도 않는 어휘(語彙)비교로 갑론을박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양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감정적으로 양민족간의 관계가 긴밀한 것이 밝혀지면 무언가 치욕감 같은 것을 느끼는 - 그런 것이 소위 학문한다는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이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가설을 근거로 해서 적극적인 연구방법을 취했습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취한 “단어 대(對) 단어” 식의 개별적인 비교방법 대신에 두 나라말 전 어휘를 대상으로 하여 단어군(單語群)끼리 비교하는 방법입니다. 단어군은 선형(線形)·원형(圓形), 명(明) ·암(暗), 성장·사멸, 연결·절단 등 기본적인 관념을 중심으로 유별하여 비교한 결과 한·일 두 나라말의 전 어휘군에는 음·양(陰陽)의 두 개의 의미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던 것입니다.
음·양이라고 이름지은 이유는 대표적인 색채어 ‘검다’와 ‘붉다’의 두 단어에서 연유한 이름인데 두 어휘군이 의미하는 바를 보면 음계는 암흑적·폐쇄적·원계(圓系)적인 데 대하여 양계는 광명적·개방적·선조적인 개념을 나타냅니다.(시간제한으로 비교의 실례를 예시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잡다한 현상계를 상대적(相對的)으로 포착하여 이러한 대칭적(對稱的)인 범주를 가지고 조어(造語)했다는 것, 이것은 동양철학의 근본인 음양오행(金·木·水·火·土)설, 나아가서 역(易)의 태극사상의 기저가 되는 것으로 인간 사고의 균형과 조화를 이상으로 하는 중도(中道)의 입장이 여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발견 당시의 나의 놀라움은 이러한 철학적 의미보다도 이제까지 음양사상은 중국 한(漢)민족의 고대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터에, 알타이 제어의 어휘군 속에 음양의 의미체계가 언어 그 자체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기원적인 면에서의 놀라움이었습니다.
이로써 아시아 대륙의 북방민족인 알타이 제족의 문화가 중국문화의 기초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언어 연대학(年代學)의 방법을 적용한 결과 한·일 두 언어가 지금으로부터 5~6천년 전, 한반도에 있었던 공통조어(共通祖語)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수천이 넘는 세계 제언어 중에서 가장 친연성(親緣性)이 깊은 친족어(親族語)라고 봅니다.
일본어가 한국어 이외에 더 친근한 언어가 이 지구 위에 없다는 의미에서 뿌리 깊은 형제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있듯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마찰과 알력과 충돌이 일어나기 쉬운 관계에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만 잘 살겠다는 이기주의적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차세계대전에서 경험했듯이 애국(愛國) 애족(愛族)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이기주의적 국가주의(내셔널리즘)의 피해가 얼마나 위력을 휘둘렀는지, 그 결과로 원자탄까지 출현하여 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조차도 남아나지 못할 위기에 빠질 염려가 생기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년 신과학(新科學) 논의에서 전체를 중시하는 경향을 존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어떤 사물이든지 그 가치와 의미는 전체에 있는 것이지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전체론자’입니다.
내 언어학 연구의 경험에서도 일본어와 한국어가 무엇을 공유하는지 살피는 것이 두 언어의 관계의 이해에 중요한 열쇠가 되며 개별적 단어의 비교보다 큰 단어군의 비교가 생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과거의 성인(聖人)들이 모두 이타적(利他的)인 가르침으로 사랑과 인(仁)과 자비(慈悲)를 강조하신 이유는 고차원의 입장에서 전체를 보시고 공생(共生)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20세기 한 세기 동안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루고 전후 50년이 지났는데도 냉전으로 지새우다가 드디어는 한쪽이 무너져서 이제는 세계가 안정되는가 싶더니 오히려 세계 각처에서 반목과 분쟁이 더 갈피를 못 잡는 현황이고, 게다가 과학문명의 발달과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은 상호의존적 세계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인데도 인간의식의 수준이 전체의 이익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내셔널리즘을 붙잡고 있으니 피해의식으로 인류는 전전긍긍해야 할 판입니다.
나의 평생교육에 대한 이해로는 학교교육이라는 한시적 교육이나 기능·기술 등의 국한분야의 교육으로서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의식차원을 높이는 교육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일생을 통한 전인(全人)적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평생교육뿐 아니라 보살도(菩薩道) 정신으로 세세생생 영원히 닦아나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과학주의나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세계풍조는 현재 동양도 서양도 종교 기피증에 걸렸거나, 또 어느 한쪽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광신적으로 다른 종교를 비방하거나 박해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나, 이것도 모두 교설 창시자인 성인들의 공생원리의 가르침과는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교육도 확대하면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의 계율이며, 자기가 ‘산다’는 자동사와 타(他)를 ‘살린다’는 타동사, 거기에 생명의 철학이 있습니다.
천지는 나와 동근(同根)이며 산천초목 만물이 나와 동체(同體)라는 동양의 자연관은 우주에 가득차 있는 전체 생명을 느끼는 데 실감을 줍니다.
나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불교에서 공생의 가르침을 받고 학교를 퇴직한 후 10여 년간 참선수행을 하는 중입니다만, 참선이란 우주에 가득찬 진리생명과 하나가 되는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 -계속
-1998년 8월 11일 생애교육
노무라 센터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