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행원(行願)’인가?

성불의 길 보살의 길2/보현행원, 그 원(願)과 행(行)

2007-09-23     관리자

보현행원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행원이라는 용어다. 행원엔 행만 있는 것도 아니고 원만 있는 것도 아닌, 행원이 동시에 구족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행이란 무엇인가? 행은 세속적으로도 중요하다. 행이 모든 것을 바꾼다. 행이 인간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며 변화시켜 나간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비로소 짜지듯 아무리 번드르르한 이론이나 지식도 행이 없으면 공허하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동감하는 일로 일상사에서 행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까닭에 일찍이 지행합일을 강조한 학문도 있었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행이 있었다’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분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설계도가 있어도 직접 지어야 우리 앞에 훌륭한 건축물로 나타나는 것이요, 백 날 다짐해도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행은 신체와 마음을 변화시켜 질병도 치유한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행으로 고칠 수 있다.
수많은 성인병이 운동으로 호전되며, 스트레스가 많을 때나 우울할 때 정신과 의사들이 흔히 권하듯 운동이나 취미 생활로 호전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렇듯 행은 우리 주위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며 모든 어둠을 몰아낸다.

보현행원에서의 행은 이런 일반적인 의미 외에 특별한 뜻 두 가지가 더 있으니, 하나는 깨달은 자의 구체적 자기 표현으로서의 행과 또 하나는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길라잡이의 행이 그것이다.
깨달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행으로 나타난다. 행이 동반되지 않는 깨달음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일생은 깨달은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웅변으로 보여 준다. 부처님은 어려운 말씀을 쓰지도 않으셨으며 낮은 자를 경멸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넘어진 똥치기 니다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고통 속에 부처님을 애타게 찾는 위제희 부인을 위해 멀리서 그 몸을 나투어 주셨다. 깨달은 자의 모습은 이와 같은 것이다. 행원 열 가지는 바로 깨달은 자가 어떻게 실지로 이 땅에서 생활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칭찬하고 공경하며 남을 극진히 섬기는 열 가지 행원은 바로 진리를 깨달은 자가 중생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다. 깨달은 자는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하여 중생의 어린 마음 모두 헤아려 아시며 안타까운 허물을 덮어주시고 보잘 것 없는 보리의 싹을 북돋워 꽃피우게 하여 주신다.

길라잡이의 행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이 깨달음을 이끌어낸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숱한 행과 함께 온다. 섬기고 공양하는 열 가지 보현의 행은 그 모든 행의 진수로서, 비록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행을 하는 이들을 마침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는 말이다. 행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끈다. 우리가 비록 미혹하지만 보현의 원행을 일념으로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 깨달음으로 한 발짝 성큼 다가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보살은 여래의 공덕문으로 들어 오기 위해선 바로 이 열 가지 행원을 닦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보현 행원은 이렇듯 깨달음의 구체적 표현인 동시에 미망의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실질적 수행 방편이다.

원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욕심이다.욕심이 있으니까 사람은 지금의 괴로움도 참는 것이며 발전이 있게 된다.그러면 과연 욕심이 전부일까?
“비록 황금이 수미산만큼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부처님 말씀도 있듯이 욕심은 끝없는 갈애를 일으킨다.욕심만 가지고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지고 이름을 날리더라도 무언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욕심으로 일을 해 나갈 때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어찌 그리도 주위에는 시기하는 이, 방해하는 이 가 많은지 곳곳에 적이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잠시도 쉬게 하지 않는다.그리하여 종교마다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욕심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라, 고뇌와 괴로움이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욕심을 원으로 바꾸면 그 때부터는 일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된다. 욕심을 원으로 바꾸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중생의 삶에서 보살의 삶으로 바뀌게 되니, 정녕 보살은 원으로써 중생의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욕심을 어떻게 원으로 바꾸는가?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님’을 갖다 놓으면 된다. 내가 하면 욕심이요, 부처님이 하시면 원인 것이다. 돈도 내가 많이 벌겠다 하면 욕심이나 부처님이 버시면 원이 되니, 나라는 아상(我相)이 있던 곳에 부처님을 갖다 놓기만 하면 하늘보다 높던 욕심이 그 즉시 하늘보다 더 높은 원으로 변한다.
원을 세우면 똑같은 일인데도 하는 일마다 기쁨이요, 보람이 가득하며 곳곳에 숨어 있던 여러 부처님 보살들이 잘한다 하시며 칭찬하고 도와 주게 되어 어려운 일들이 술술 풀려 신바람이 절로 나게 된다. 서원안락행(誓願 安樂行)이란 말도 있듯이 원이 있는 사람은 또한 편안하고 즐겁기 그지없다.
참으로 원은 중생의 깊은 잠을 깨우며 고달픈 중생의 삶에서 환희로운 보살의 삶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보현 행원은 이런 원과 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갖출 것을 가르치니, 행 곳곳마다 원 또한 끝이 없고 원 하나하나마다 행 또한 끝이 없다. 이런 이유로 단순한 ‘보현행’이 아니라 그 이름이 ‘행원’인 것이다. 보현 보살이 가는 곳마다 원과 행이 끝이 없는 것이다.
원이 없는 수행은 위험하다. 아무리 뛰어난 수행을 하더라도 원이 없으면 자칫하면 법집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원과 행이 하나가 될 땐 폭발적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런 연유로 행원품에선 행원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행에는 원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불우 이웃 돕기 성금함에 한 닢 돈 넣을 때도 ‘이 정성이 보잘 것 없지만 반드시 어려운 이에게 도움이 되어지이다.’ 하고 원을 발하며, 경을 하나 읽을 때도 ‘이 경 읽는 소리가 시방 법계에 두루 울려 퍼져 모든 중생들의 보리심을 일깨워지이다.’ 하고 원을 발하면서 한 자 한 자 간절히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이 행 하나하나에 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보현의 원행이다.
그렇지만 범부 중생이 원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원이 없으니 행이 없고, 행이 없으니 과도 없지만, 그래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 도대체 내 가슴에 타오르지 않는 원을 어떻게 일으킨단 말인가.참으로 중생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행원품은 자비롭게 원을 일으키는 법을 말하고 있으니, 이름 그대로 바로 ‘행을 먼저 하는 것’이다. 요즘 중·고교에선 봉사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 사회 봉사활동을 점수로 따게 하는데, 이들 중엔 처음엔 점수 목적으로 그런 곳에 갔다가 감화를 받은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행은 원을 불러 일으킨다.먼저 무엇을 바쳐야 할지 모르는 그 원부터 ‘부처님, 지금은 비록 제가 보잘 것 없지만 반드시 큰 원을 세워 부처님께 공양 드리겠습니다.’ 하고 공양드려 보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구체적 모습을 띠며 원력이 불붙듯 활활 타오르게 된다.
이와 같이 행은 원을 이끌어 내고,원은 행을 배가시키니, 경은 보현 ‘원행’품이 아니고 ‘행원품’으로 이름지어 진 것이다.

이런 행원을 함에 있어 기본 마음 가짐으로 경에서는 세 가지를 갖추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행원에 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無有窮盡). 그것은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니, 끝없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 바로 보현의 원과 행이다.
둘째는 행원을 하는 데 있어 결코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無有疲厭), 셋째는 한 번 하고 좀 쉬고 생각날 때 다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한시도 끊이지 않으며 쉬지 않고 순간순간마다 염념히 이어지는 그런 행원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念念相續 無有間斷).영화가 움직이게 보이는 것도 사진이 끊이지 않고 돌아가기 때문이며 방울방울 내리는 빗방울이 마침내 바위를 뚫는 것도 역시 끊이지 않고 내리기 때문이니, 우리의 행원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연속성을 가질 때 비로소 큰 힘이 나오게 되는 까닭이다.
이런 다짐 아래 보현 행원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