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펼쳐지는 소리 없는 날개짓이여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원장현의 대금소리

2007-09-23     관리자

사락사락 흰눈 내리는 겨울
대나무끝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싸-한 동죽풍(冬竹風)이 코끝에 스칠 때면
그것이 선풍(禪風)이런가
청명한 바람이 뼈속 깊이까지 스민다.

대금의 명인 원장현(50세)의 고향은 대나무의 고장 담양이다. 그곳에는이름처럼 맑고 깨끗하고 싱그러운 정원 소쇄원이 있다. 인간세의 영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음풍농월하던 곳, 담양은 예로부터 대나무의 상징처럼 절개의 고장으로 꼽힌다. 송강 정철은 이곳 담양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성산별곡을 남겼다. 이곳에서 난 원장현은 고향의 대나무로 자신이 직접 만든 대금으로 소리를 내고 그 소리 하나로 이 세상 모든 한을 잠재우고, 소리 하나로 이 세상 모든 혼을 선계(禪界)에 들게 한다.
열여섯의 나이에 숙부(원광호, 국가지정 거문고산조 무형문화재 16호)의 권유로 대금을 불게 된 그는 한 달 만에 그 소리를 익혔고 그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의 부친 또한 대금을 취미로 하셨기에 그 소리는 그의 소리처럼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면서 그는 직접 현장음악에 참여함으로써 음악적 자양성분을 섭취하게 된다. 어릴 때의 꿈과 절망, 하지만 그것은 곧 그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원천이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담양에서 마친 그는 광주로 나와 김용기 선생에게 대금의 기초를 배우고 오진석 선생에게 향제풍류(鄕制風流), 곧 지방에서 연주되던 정악(正樂)을 익히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 김동진 선생과 한일섭(1927-1973) 선생에게 사사하는 인연을 맺게 되고 후에는 한일섭 선생의 계보를 잇게 된다. 그가 오늘날 연주하는 대금산조에는 한일섭 선생이 구음(口音)으로 가르쳐준 가락이 많다고 한다.
그는 1985년 국립극장에서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공식으로 발표했다.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였다. 대개의 경우 ‘류(流)’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은 고인이 된 분을 추모하거나 원로를 존경해서 그 제자나 후배들이 붙여주는 것이 거의 관례이다시피 했다.
그런데 스스로가 감히 원장현’류’를 붙였고 다행히 국악계와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 이후 산조에 누구누구 ‘류’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의 음악은 장단이라는 틀 속에 들어있는 산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박자 형태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꾸밈이 없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꿋꿋하고 힘이 넘치고 강렬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다고들 한다.
“전해내려오는 음률을 흉내내는 작업도 평생 걸려 한다고 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창작곡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이 없으면 그냥 흘러버리는 것이지요. 전공자들이 ‘류’를 선택해서 공부를 해야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산조가 답습의 형태였다고 한다면 새로운 창조도 발전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한일섭 선생에게 구음으로 전수받은 산조의 기틀은 그가 자신 특유의 더늠을 조화시켜 새로운 대금산조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의 젊은 나이라고는 하나 그동안의 그의 노력은 곱하기를 해야 할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대금을 하겠다고 객지생활을 하면서의 가난과 고난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대금을 시작한 그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모가 느껴져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 거지나 다름없이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대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한순간도 누구를 원망한 적이 없다. 그저 좋아서 그 일을 했을 뿐이다. 대쪽 같은 담양인의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이제 나이 쉰이 되다 보니 세상의 흐름도 따르게 되고 넉넉한 여유로움도 생겼지만 그당시 그에게는 적당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종로구 안국동 전철에서 가까운 자신의 집 아랫층에 금현국악원을 열어 하루종일 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그런데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원장현 씨는 정말 대금을 불고 싶은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레슨비를 받지 않는다.
“기타나 피아노 등 서양악기는 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음악이 서양음악에 밀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인지 어렵게 느낍니다. 이러한 의식구조부터 바꿔야지요. 전주시에서는 ‘한 가정에 우리 악기 하나 갖고 배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미국사람 같아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은 힘으로 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곡을 만들 때 악보를 미리 그린 적이 없다. 머리 속에 구상이 떠오르면 앉은 자리에서 그 소리를 즉흥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면 신디사이저는 자연스레 그의 음을 받쳐준다. 구름 위에서 마음대로 떠돌테니 구름역할을 하라고 이른다. 신디사이저는 구름역할을 하고, 구름가듯 물가듯 되어지는 대로 시나위가 이루어진다. 대금을 부는 사람과 영적으로 교감되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리의 하모니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위적인 서양음악이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지난 해 가을 ‘날개’라는 이름을 붙여 출시한 CD음반 A면에는 전통산조를, 그리고 B면에는 창작곡을 담았다. 대금산조와 젓대소리 ’98, 대금시나위 ’98 그리고 날개와 낙화(落花), 고향가는 길, 소쇄원(瀟灑園) 역시 그의 고향의 소리를 닮아있다는 평이다. 산조에 들어있는 장단의 틀도 깨어버리고 자연의 호흡으로 이끌어가는 그의 시나위는 자연의 본래면목 그대로다. 나온 지 석 달만에 20,000여 장의 음반이 판매되었다. 국악 독주집으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산을 넘고 싶은 소망이, 바다를 건너고 싶은 소망이 날개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육신의 날개는 없지만 영혼의 날개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평생 그런 날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날개를 펼칠 때입니다. 아름다운 소망의 날개를… 다음생에도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즐기면서 즐거움을 주는 일인데 이보다 좋은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으면 그 순간이 내 생명이 끝나는 지점일 것입니다.”
원장현, 그는 대금의 명인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거문고, 태평소, 단소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데도 능하다. 그동안 50여 개국을 순회하면서 우리 음악을 세계 속에 알렸고,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이라는 타이틀로 인도, 몽골, 중국, 페르시아, 일본, 베트남의 민속음악이 그와 함께 선보였다. 이 행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계승발전될 것이다. 시간과 허공을 초월해 펼쳐지는 소리 없는 소리의 날개짓에 감동과 찬탄의 갈채를 보낸다.